(1288~1334년) 

고려의 대신 항은 원나라 세조 황제때 태사 충렬왕의 재상으로 있었다.

성은 박씨며, 관직은 첨의찬성사이며, 시호는 문의이다.

 

아들 광정은 처음에 본국(고려)의 자제로서 뽑혀 원나라 황실에 숙위하여, 천자의 명령으로 금부를 받아 소신교위가 되었고, 고려서경등처 수수군 부만호 겸 광정대부 평양부윤이 되었다가 별세하였다.

 

그의 아들은 정윤 거실, 손자는 독만으로 능히 그 직을 세습할 만 하였으며 관계는 모두 소신교위였다.

 

돌아가신 평원군부인 원씨는 정윤공의 부인으로, 독만의 어머니이다. 그의 11대조 극유는 국초에 벼슬하여 정의대부가 되었다. 훌륭한 자손이 이어져 (가문이) 더욱 현달하였다. 할아버지 부는 첨의중찬을 지냈고, 시호는 문순이다. 아버지 관은 첨의찬성사를 지냈다. 어머니 김씨는 낙랑군대부인에 봉해졌고, 돌아가신 밀직승지 신의 딸이다.

 

자식은 2남 5녀이다. 장남은 독만, 그 다음은 명으로 아직 벼슬하지 않았다. 장녀 중정원장사 심양 홍의손에게 시집갔으나 먼저 죽었다. 2녀는 흥위위 낭장 김지경에게 시집갔다. 3녀는 중대광 낙랑군 왕수에게 시집갔는데 종실이다. 4녀는 선수왕부단사관 광정대부 전정당문학 이제현에게 시집갔다.

 

부인의 천성은 선량하고 성품은 부드럽고도 지혜가 있어, 부모가 그녀를 아꼈다. 13세때 따를 만한 배필 박씨를 택하여 그 가문에 들어가 시부모의 뜻을 잘 받드니 (시부모가) 사랑함은 그 부모와 같고 예로 대우함은 그보다 더하였다.

 

얼마 안되어 광정공이 별세하자, 시어머니 정씨가 집에 있게 되었다. 정윤공이 부친을 대신하여 숙위에 임명되어 원나라 서울에 머물렀다. 부인이 정씨를 보살피고 봉양하는데 거슬림이 없이 잘 섬겨 편안하게 임종하실 수 있었다. 뒤에 정윤공 또한 별세했는데, 자녀 가운데 결혼하지 못한 자가 다섯 사람이었다. 부인이 집안을 주관한 지 9년이 안되어 모두 배우자를 택하여 혼인하였다. 부인의 친정 형제자매도 모두 귀하게 되고 현달하였다. 태부인도 병이 없었다. 일가친척도 날로 번성하였다. 부인이 일찍 과부가 되어 그 사이에서 처신함에 윗사람의 뜻을 받들고 아랫 사람을 대우함에 그 공순함을 다하고 예로써 스스로를 지켰다. 온 가문의 사람들이 부인을 칭송하였다.

 

가문의 재산은 넉넉하였으며 정윤공이 묻지 않아도 부인이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다. 다스리는 노비 숫자가 수백이나 되어도 어떤 사람도 한 마디도 부담을 주거나 원망하는 말을 하는 자가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원통 2년 12월 갑술에 병으로 별세하였다. 47세였다.

 

아 부인은 현명하였으나 그 수를 누리지 못하였도다. 아들과 사위들이 상례를 치르고, 이듬해 2월 기미일 모지의 언덕에서 장례를 치뤘다. 나에게 묘지명을 청하였다. 홍장사는 동년의 친구이며, 또한 이광정을 알기도 짧지 않아, 감히 어찌 묘지명을 거절할 것인가?

 

명하여 이르기를,

 

아녀자로서 부모를 받들었고,

부인으로 믿음이 있어 수신하였으며,

어미로서 자식에게 자애로왔다.

오직 때에 맞추어 고르게 하였도다.

현명하였으나 수를 누리지 못하였으니

아아 부인이여!

 

 平原郡夫人元氏墓誌

 

高 麗有大臣諱恒者在 世祖皇帝時相 太師忠烈王姓朴氏位僉議賛成事謚曰文懿有子曰光挺始以本國子弟被選宿衛闕庭受 天子之命帶金苻爲昭信校尉高麗西京等處水 手軍副万戶兼匡靖大夫平壤府尹而卒其子正尹居實孫禿滿能世襲其職階皆昭信故平原郡夫人元氏實正尹公之妻於禿滿爲母其十一代祖諱克猷仕國初爲正議大夫華胄蟬 聯益顯以大祖諱傅故儉議中賛謚文純父諱瓘故僉議賛成事母金氏封樂浪郡大夫人故密直承旨諱信之女也其子男二人女五人男長即禿滿次長命未仕女適中政院長史瀋陽 洪義孫先歿次適興威衛郞將金之庚次適重大匡樂浪君王琇與國同宗次適 宣授王府断事官匡靖大夫前政堂文學李齊賢夫人生有淑質性柔且慧父母愛之年十三擇所從配 朴氏入門承舅姑愛如其父母而礼待過之未幾匡靖公下世姑鄭氏在堂正尹公替父充宿衞住 輦下而夫人左右鄭氏奉養無違以善事得其終焉後正尹公又逝男女未冠笄者有 五人夫人主家未九年俱選其對以昏嫁之元家弟妹皆貴顯太夫人尙無羔宗婣日盛而夫人早寡處於其間所以奉承接遇盡其恭順而以禮自守一門多稱之家故足貲正尹公不以 爲問夫人制之有法度撫御婢僕且數百不聞有人出一言以負且怨者元統二年甲戌十二月甲戌以疾卒年四十又七嗚呼夫人其賢而不壽者乎子壻治喪卜以明年乙亥二月己未 葬于某地之原問銘於予予於洪長史爲同年友又受知李匡靖爲不淺銘其敢拒而已耶銘曰

女承而親婦信而身母慈而子維時維均賢不克壽嗟嗟夫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