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2~1340년)
중대광 현복군 권공 묘지명 및 서문
권씨는 김행에서 비롯되었다. 김행은 신라의 대성으로 복주의 태수였는데, 태조가 이미 왕위에 올라 신라를 공격하여 복주에 이르자, 김행은 천명이 돌아가는 바를 알고 항복하였다. 태조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김행은 능히 권도가 있다고 할만 하다” 말하고, 권씨라는 성을 주었다.
후세에 가문의 많은 이들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문청공 단은 신망이 컸고, 첨의참성사를 지냈다. 국재선생인 부는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으며, 문장과 도덕이 당대에 으뜸이었다. 송재선생 준은 길창부원군에 봉해져 관원을 두었다. 겸손하며 절의를 지켰으며, 집에 머물기를 즐겨하였다. 온 나라 사람들이 선생을 존경하였다. 3대가 모두 지공거를 지내 많은 문생들이 높은 관직에 올랐다. 이 때문에 부귀를 흠모하고 예법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모두 권씨에게 돌아갔다.
의릉의 비가 된 공의 딸은 수비이고, 영릉의 비 화비는 공의 누이의 딸인 홍씨이다. 이는 (왕실이) 권씨를 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공은 비록 문음으로 높은 관직에 올라 세상에 이름을 빛내었으나 마음에 그다지 즐거워하지 않았다. 오직 절의를 중히 여겼다. 세상에서는 이 때문에 공을 칭찬하였다.
공의 이름은 렴이며 자는 사렴이다. 송재공이 밀직사 오인영의 딸에게 장가들어 대덕 임인년 동10월 기사일에 공을 낳았다. 10세 때 함경전 녹사에 임명되었다. 연우 갑인년 별장으로 옮겼다. 이듬해 보마배행수에 선발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낭장으로 승진하였다.
정사년 연경에 갔다. 무오년 삼사부사에 임명되고, 관계는 봉상대부에 올랐다. 여름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지치 계해년 또 연경에 가서 황제가 계신 곳에 나아가 받들었다. 태정 갑자년 중정대부 사복정이 되었다. 이듬해 원나라 황제에게 아뢰어 선무장군 합포진변만호부 만호에 임명되었다. 대개 선대부터 물려받은 관직이다. 그 이듬해 응양군 대호군으로 관직을 옮겼다. 다시 그 이듬해 선군별감이 되어 토지를 나누어 줌에 법도가 있어, 사람들이 그것을 편하게 여겼다. 천력 무진년 연경에 갔다. 지순 경오년 고려로 돌아와 정순대부 좌상시에 임명되었다. 후지원 을해년 현복군에 봉해졌다.
공은 아량이 있고 공무를 다스리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축년 숭교리 연못 옆에 누각을 짓고 편액을 “운금”이라 하고, 익재 이시중이 기를 지었다. 매번 꽃이 피면 성찬을 차리고 손님들을 맞이하여 좋은 술로 윗사람들에게 장수를 축하하는 술을 드리고 자손들이 모두 모이니 당시의 사람들은 이를 흠모하였다. 무인년 춘삼월 의릉이 말하기를 “현복군은 함께 정사를 의논할 만하다” 고 하고, 공에게 광정대부 첨의찬성사로 임명하였다.
당시 연남 출신인 양재가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공은 그 사람됨을 비루하게 여겨 사귀지 않았다. 양재가 그것을 마음에 품고 원망하여 공의 임명을 극력 저지하였다. 이듬해 다시 현복군에 봉해졌고, 일년이 지나 공은 집에서 병으로 별세하였다. 경진년 4월 초 9일이다.
정헌공 왕후는 공의 숙부이다. 정헌공이 울면서, “권씨의 자제로 만호보다 현명한 이가 없다. 나는 일찍이 그가 권씨의 종족을 비호해주리라고 바랐다.
하늘은 어찌 이다지도 빨리 나의 현명한 자제를 뺏어가는 것인가.” 라고 말하였다. 정헌공은 좋아하는 바에 아부하지 않았고 또 사람을 알아보는 학식과 견문을 가지고 있어, 공의 어짊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공은 부귀한 집안에서 자랐으나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물리쳤으며, 경조사에는 반드시 몸소 갔다. 타인의 장례에 종족과 벗을 불문하고 검은 갓과 흰 옷을 입고 안색을 슬프게 하여 보는 자들이 그 지성에 감복하여 모두가 자기들이 미치지 못할 바라고 여겼다. 평생 사람들과 잘 사귀어 사람들이 환난을 당하면 힘을 다해 도와주려 하였으며 일이 수습된 뒤에야 도와주는 것을 그쳤다. 비록 주연 베푸는 것을 좋아하였으나 노래 부르며 노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고 또 활쏘기와 말 타기를 잘하여서 사냥하면서 어긋나는 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잡은 것이 매우 많아, 무부들이 그의 능력을 칭송하였다.
그가 좋아하지 않는 것은 작록이며, 부모에게 받아들여지고 벗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그의 큰 바램이었다. 공이 섬기거나 벗하는 자는 익재 이시중 회안 장순공 양파 홍시중 안상헌 안근재 홍당성 김언양 민급암 최졸옹 이평리 권・배복야 배천경이다. 모두 당대의 호걸들로 문학과 정치, 말타기와 사냥에서 사람들이 지금도 으뜸으로 삼는 이들이다. 공은 그들과 교유하여 자연스럽게 재주를 익혔으며 또 죽은 시중 김봉일을 초빙하여 몽고어를 익혀 잘하였다.
그 재주의 아름다움이 족히 많았으나, 하늘은 어찌하여 공에게 천수를 내리지 않았는가. 공이 돌아가셨을 때에 조부모와 부모가 모두 병이 없었으니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으며, 공이 장차 죽으려 할 때 조부모와 부모를 생각하였을 것이니 공의 마음은 또 어떠하였겠는가. 아 슬프다.
부인 조씨는 도첨의찬성사를 지낸 충숙공 연의 딸이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자식들을 가르침에 법도가 있어 종족들이 부인을 칭송하였다. 공이 돌아가신지 지금 삼십여 년이다. 자식들이 모두 높은 관직에 올라 집안을 잇고 있으니 죽은 영혼인들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공이 돌아가실 때에 이색의 나이 겨우 13세였다. 누가 13세의 어린아이가 공의 묘지명을 지으리라고 말했겠는가. 아. 이것이 모두 감개로운 일이다. 공의 자식들이 모두 나와 친하게 지냈고 또 찾아와서 공의 묘지명을 부탁하는 까닭에 그 집안의 내력과 거쳐간 관직을 서술하고 자손을 기록한다.
장남 용은 선무장군 합포진변만호부만호 중대광 현성군이다. 차남 현은 왕부단사관 봉익대부 판도판서 상호군이다. 3남 호는 봉익대부 전법판서 상호군이다. 4남 균은 봉의대부 융상제점소 제점 봉익대부 전공판서 상호군이다. 5남 주는 중정대부 삼사좌윤 진현관직제학 지제교이다. 장녀는 수비이다. 차녀는 원나라 한림학사승지 영록대부인 보달실리에게 시집을 갔다. 3녀는 봉익대부 판전의사인 오중화에게 시집을 갔다. 4녀는 중정대부 전의령 보문각직제학 지제교인 염국보에게 시집을 갔다. 5녀는 선수정동행중서성 도진무사도진무 충근찬화공신 광정대부 정당문학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인 원송수에게 시집을 갔다. 손자와 손녀 몇 명이 있다. 현성군은 2남 4녀를 낳았다. 장남 준은 행수별장이다. 차남 연은 산원이다. 딸은 별장 민공량, 차녀는 중랑장 송인수에게 각각 시집을 갔으며, 나머지는 아직 시집가지 않고 집에 있다. 단사관은 1남5녀를 낳았다. 남자는 수안으로, 성균학생이다. 딸은 도제고판관 김균에게, 차녀는 보마행수별장 박자안에게, 차녀는 별장 김을부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판서는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징은 행수낭장이며, 차남 한은 성균진사이며, 차남 담은 전보도감녹사이다. 딸은 좌우위녹사 홍희충에게, 차녀는 별장 한휴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제점은 1남 2녀를 낳았다. 남자인 홍은 성균학생이다. 딸들은 모두 어리다. 좌윤은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훈, 차남 식은 모두 어리고, 여자 또한 어리다. 외손 몇 명이 있다. 승지는 1남 1녀를 낳았다. 남자는 습득로이며, 딸은 어리다. 오씨는 1남 4녀를 낳았다. 아들 제보는 흥복도감녹사이며, 딸들은 모두 어리다. 염씨는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치중은 목릉직이며, 차남 치화는 창릉직이며, 딸은 어리다. 원씨는 2남을 낳았다. 장남 서는 복두점녹사이며, 차남 상은 사경원판관이다. 장례는 개성현의 대평원 서쪽 언덕에 지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이미 어버이에 효도하고 또 사람에게 믿음을 받았으며
벼슬 또한 군에 봉해졌으니 그 몸이 일세에 현양하였도다.
천자께서 이르기를 아라 탄식하시고 호부를 내리시니
가문을 잘 이어 그 영광이 해동에까지 넘쳤도다.
아들 많이 두고 장수하는 사람이 세상에 많기도 하건만
한스럽게도 공에겐 부족하였으니 그 누가 방해하였던고
오직 일시의 은총은 사람이 어질지 않으면 중하지 않을 것이나
저 무덤이 황무할 지라도 경의 이름은 민멸되지 않으리라.
重大匡玄福君權公墓誌銘(幷序)
權 氏始於金幸新羅大姓也守福州 太祖旣正位攻新羅行至福幸能知天命所歸擧邑以降 太祖喜曰幸也可謂有權矣因賜姓曰權後世多聞人文淸公諱㫜有重望僉議賛成事菊齋先生諱溥位冢宰文章道德冠一時松齋先生諱準封吉昌府院君置僚佐謙恭守節義善居 室一國傾向三世知貢擧門生多達官是以歆富貴慕禮法者皆歸權氏 毅陵納公之女曰壽妃 永陵納公之姊之女洪氏曰和妃重權氏故也公雖以門蔭致身華顯心甚不樂惟重節義世以此多之公諱廉字士廉松齋娶密直使吳公諱仁永之女以大德壬寅冬十月己巳生公年 十歲補含慶殿錄事延祐甲寅遷別將明年選充寶馬陪行首未幾進郞將歲丁巳如燕京戊午拜三司副使階奉常大夫夏東還至治癸亥又如京進奉帝所泰㝎甲子加中正大夫司僕 正明年奏授宣武將軍合浦鎭邊萬戶府萬戶盖世職也又明年改鷹揚軍大護軍又明年爲選軍別監授田有法人便之天曆戊辰如京師至順庚午東還拜正順大夫左常侍後至元乙 亥封玄福君以公雅量不樂治公務故也歲丁丑作樓于崇敎里蓮池之傍額曰雲錦益齋侍中爲之記每花開設盛饌邀大賔上尊公壽子姓咸集時人歆慕之歲戊寅春三月 毅陵曰玄福君可與議政事於是批公匡靖大夫僉議賛成事時燕南梁載得幸於上公鄙其爲人不與交禮載深銜之力沮其命明年再封玄福君一年而公以病卒于家歲庚辰四月初 七日也正獻公王煦公之叔父也泣涕而言曰權氏子弟莫賢於萬戶吾甞望其庇宗族焉天何奪吾賢子弟如此之亟乎正獻公不阿所好且有鑒識公之賢可知已公生長膏梁而郤美 飾慶吊必親送人之葬不問宗族朋友玄冠素服戚見顏色觀者服其誠皆自以爲不及平生善交人遇其患難盡力救解事已乃已雖好燕飮不喜聲妓又工射御田不詭遇而獲甚多武 夫皆稱能也其所不樂者爵祿也獲乎親獲乎朋友其大欲也公所事而友之者如益齋李侍中淮安莊順公陽坡洪侍中安常軒安謹齋洪唐城金彥陽閔及庵崔拙翁李評理權裵僕射 天慶皆一時豪傑文章政事馳騁射御人至今宗之公游其間習慣如自然而又招故侍中金公逸逢習蒙古語多通之其才之美有足多者而天不與之壽何歟公之亡也祖父母父母皆 無恙祖父母父母之心爲如何而公之將絶也念及祖父母父母其爲心又如何也嗚呼悲哉夫人趙氏都僉議賛成事謚忠肅諱璉之女妙年而寡敎諸子有法宗族稱之公之歿今三十 餘年矣諸子皆達官能世其家九原之下夫豈無知哉公歿時穡年纔十三誰謂十三歲之童子當秉公幽堂之筆乎嗚呼是皆可以感矣公之諸子皆與穡善來徵銘故叙其家世歷官而 書子孫長男曰鏞宣授宣武將軍合浦鎭邊萬戶府萬戶重大匡玄城君次曰鉉宣授王府斷事官奉翊大夫版圖判書上護軍次曰鎬奉翊大夫典法判書上護軍次曰鈞宣授奉議大夫 隆祥提點所提點奉翊大夫典工判書上護軍次曰鑄中正大夫三司左尹進賢館直提學知製敎長女壽妃也次適元朝翰林學士承旨榮祿大夫普達實理次適奉翊大夫判典儀寺事 吳仲和次適中正大夫典儀令寶文閣直提學知製敎廉國寶次適宣授征東行中書省都鎭撫司都鎭撫忠勤賛化功臣匡靖大夫政堂文學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元松壽 孫男女若干人玄城君生二男四女長曰濬行首別將次曰演散員女適別將閔公亮次適中郞將宋仁壽次在室斷事官生一男五女男曰壽安成均學生女適都祭庫判官金稛次適寶 馬陪行首別將朴子安次適別將金乙富餘皆幼判書生三男二女長曰澄行首郞將次曰澣成均進士次曰湛典寶都監錄事女適左右衞錄事洪希忠次適別將韓烋提點生一男二女 男曰弘成均學生女皆幼左尹生二男一女長曰壎次曰埴皆幼女幼外孫若干人承旨生一男一女男曰拾得驢女幼吳氏一男四女男曰齊甫興福都監錄事女皆幼廉氏二男一女長 曰致中穆陵直次曰致和昌陵直女幼元氏二男長曰序幞頭店錄事次曰庠寫經院判官葬在開城縣大平院之西原銘曰
旣孝于親而信於人位又封君顯矣其身天子曰吁錫之虎符善繼家門光溢海隅多男而壽世則多有獨慊於公誰其掣肘惟時之寵匪賢不重公名不磨有荒丘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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