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0~?년)

고려국자진사 운곡선생 묘갈(高麗國子進士 耘谷先生 墓碣) [전액(篆額)]

고려국자진사 운곡선생 묘갈(高麗國子進士 耘谷先生 墓碣) 허목(許穆)

 

선생은 원주인(原州人)으로, 성은 원씨, 휘는 천석(天錫), 자는 자정(子正)이다. 고려의 국자감 진사인데, 고려의 정치가 어지러움을 보고 은거하여 지절을 지키며 호를 운곡선생(耘谷先生)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고려가 멸망하자 치악산(雉岳山)으로 들어가 종신토록 나오지 않았다. 태종이 여러 번 불러도 오지 않았다. 태종은 그의 의리를 고상하게 여겨서 일찍이 동쪽에 노닐 떼 그의 집에 행차한 적이 있었다. 선생은 숨어버리고 뵙지를 않았다. 태종은 계석(溪石) 위로 내려가서 그 집을 지키는 노파에게 후한 상을 하사하고, 그 아들인 형(泂)에게 기천감무(基川監務)를 제수하였다. 뒷날 사람들이 그 계석을 태종대(太宗臺)라 불렀다. 그 대는 치악산의 각림사(覺林寺) 옆에 있다. 지금 원주 읍에서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석경(石鏡) 마을에 운곡 선생의 묘소가 있다. 그 앞에 또 하나의 분묘는 부인 유인(孺人)의 묘소라고 한다.

 

처음 선생에게는 장서(藏書) 7책이 있었다. 이는 망국(亡國)의 고사를 말한 것이었다. 자손들이 망녕되이 펼쳐 보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그러나 여러 대를 전하자, 자손 중에 한 사람이 가만히 펼쳐 보았다. 그는 크게 두려워하면서, “우리 집안이 멸족된다.”하고는, 들어다가 불살랐다. 그래서 그 책은 전하지 않는다. 그래도 남긴 시집이 있으니, 이른바 시사(詩史) 라는 것이 이것이다.

 

나는 듣건대, “군자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숨어 살아도 세상을 저버리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비록 세상을 피하여 스스로 즐겼지만, 세상을 잊은 분이 아니었다. 변함없이 도를 지켜 그 몸을 깨끗이 한 분이었다. 백이(伯夷) 의 말에, “옛날 선비는 치세(治世)를 만나면 그 직임을 피하지 않았고, 난세를 만나면 구차하게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지금은 천하가 어두우니 그것을 피하여 나의 행실이나 깨끗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그렇기에 그 열전(列傳) 에서 칭송하기를, “날씨가 추운 뒤에야 소나무와 전나무가 뒤늦게야 조락(凋落)한다는 것을 알고, 온 천하가 혼탁한 뒤에야 청렴한 선비가 더욱 드러난다.”라고 하였다. 맹자도, “백이는 그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아니하고 그 백성이 아니면 부리지 아니하며, 치세에는 나아가고 난세에는 물러났다. 백이는 성인의 청(淸)한 자이다.” 라고 하였다. 선생은 대개 백이와 같은 부류라고 하겠다. 고을 사람이 선생을 위하여 사우(祠宇)를 세우고 제사를 지내니, 그 사우는 원주 북쪽 30리 되는 칠봉(七峯) 마을에 있다.

 

선생의 세첩(世牒)을 상고해보니, 시조는 호장(戶長) 극부(克富)이다.(始祖 戶長克富)극부가 종유(宗儒)를 낳고, 종유가 창정(倉正) 보령(寶齡)을 낳고, 보령이 창정 시준(時俊)을 낳고, 시준이 정용별장(精勇別將) 열(悅)을 낳고, 열이 종부령(宗簿令) 윤적(允迪)을 낳았다. 윤적은 천상(天常), 천석(天錫), 천우(天佑)를 낳았다. 천상은 진사(進士)를 지냈다. 혹은 ‘본조(本朝, 여기서는 조선왕조의 조정)에서 벼슬하여 드러났다’고 하지만, 참고할 데가 없다. 천우는 현령(縣令)을 지냈다. 부인인 유인(孺人) 원씨(元氏)는 종부령(宗簿令) 광명(廣明)의 딸인데, 같은 원씨는 아니다. 원주에 두 원씨가 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말한다.(孺人元氏 宗簿令 廣明之女 非一元族氏 以爲原有兩元是也) 장남인 지(沚)는 직장(直長)과 동정(同正), 차암인 형(泂)은 기천감무(基川監務)를 지냈다. 선생의 후손이 아주 번성한데, 그 가운데 기천감무의 후예가 가장 많다.

 

이어서 다음과 같이 찬(贊)한다.

 

암혈에 사는 선비

나아가고 머무름을 때에 맞추어 하네.

비록 세상에 나서지 않을 지라도

능히 그 뜻을 굽히지 않아서 그 몸을 욕되게 아니 하였네.

후세에 교범(敎範)이 섰으니, 우(禹), 후직(后稷), 백이, 숙제와 같구나.

선생은 백대의 스승이 될 만한 분이로다.

 

통정대부 전행 사헌부 장령 양천 허 목 글을 짓고 아울러 전액을 쓰다. 외 후손인 완산 후인 이명은이 글씨를 쓰다. 숭정후 27년(현종 11년 서기1670년) 3월  일에 세우다.

 

原州 元天錫墓碣

 

高麗國子進士耘谷先生墓碣(篆 題)

高麗國子進士耘谷先生墓碣

 

先生原州人姓元氏諱天錫字子正高麗國子進士見麗氏政亂隱」

居獨行號曰耘谷先生及麗兦入雉岳山終身不出 太宗累召不」

至 上高其義甞東遊 幸其廬先生避不見 上下谿石上 召」

守廬嫗厚 賜之官其子洞爲基川縣監後人名其石曰 太宗臺」

臺在雉岳覺林寺傍今原州治東十里石鏡有耘谷先生墓又前一」

墓孺人之葬云初先生有藏書六卷言兦國古事戒子孫勿妄開傳之」

累世有子孫一人竊開之大懼曰吾家族矣擧而燒之其書不傳猶」

有餘遺詩什此所謂詩史者也吾聞君子隱不遺世先生雖逃世自」

隱非忘世者也守道不貳以潔其身者也伯夷之言曰古之士遭治」

世不避其任遇亂世不爲苟存天下暗矣不如避之以潔吾行故其」

傳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擧世泯亂淸士廼見孟子曰伯夷非」

其君不事非其民不使治則進亂則退伯夷聖人之淸者也先生盖」

伯夷之倫也鄕人爲之立祠以祀之祠在州北三十里七峯稽其世」

牒始祖戶長克富克富生宗儒宗儒生倉正寶齡賓齡生倉正時俊」

時俊生精勇別將悅悅生宗簿寺令允迪允迪生天常天錫天祐天常進士或曰仕顯於本朝無所攷天祐縣令孺人元氏宗簿令廣明」

之女非一元族氏以爲原有兩元是也長男沚直長同正次男洞基」

川縣監先生後世子孫甚衆基川之世㝡大其賛曰」

巖冖之士趣舍有時縱不列於世能不降其志不辱其身敎立於後」

世則禹稷夷齊一也先生可謂百代之師者也」

通訓大夫前行司憲府掌令陽川許 穆撰竝篆

外裔孫完山後人李命殷書

崇禎後二七年庚戌三月 日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