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0-1337년)

유원 고 무덕장군 서경등처수군만호 겸 제조정동행중서성도진무사사 고려재상 원공묘지

 

王京의 남쪽 城에서 삼십리되는 곳에 산이 길게 이어져 꾸불꾸불 내려가는 모양이 가는 것 같기도, 멈추는 것 같기도, 엎드린 것 같기도, 뒤돌아보는 것 같기도하고 물줄기는 스스로 흘러 연연(涓涓)히 잠설(潛洩)하여 간방(艮方-북동쪽)으로 부터 졸졸 흐르며 곤방(坤方-서남쪽)에 이르러 흘러서 구독(溝瀆-시내)이 되더니 큰강(大江)의 물과 합하여 바다에 흘러 들어가도다.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보는(面) 그 곳에 묘택(墓宅-무덤자리)을 얻었으니 그 형세(勢)가 어찌 축덕(蓄德-덕이감춰져있는 언덕)의 언덕이라 아니 할것인가. 이곳은 고(故) 정동만호(征東萬戶) 재상원공(宰相元公)의 무덤이다. 장례후 정축(충숙6, 1337년) 육월 정유에 이르러 그곳 마을사람 최모(崔某-최해)가 아버지를 여윈 여러 아들의 청을 감히 거절할 수 없어 公의 묘지(墓誌)와 시(詩)를 새겨 그 마음을 위로할새, 공의 행적을 바로 쓰고 또 시(詩)로 명(銘)을 지어 그 아들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다음과 같이 적는다.

 

 公의 이름은 충(忠)이오 字는 정보(正甫)이다. 선세(先世)는 대개 신라북원인(新羅北原人)이며 십일대조 극유(克猷)가 처음 우리나라(本國)에 벼슬하여 정의대부(正議大夫)가 되었고, 祖의 이름은 부(傅)이며 충렬왕때 재상(宰相)으로 첨의중찬(僉議中贊)이 되었고, 시호(諡號)는 문순(文純)이며 아버지의 이름은 관(瓘)이며 고(故)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요, 어머니 金氏는 낙랑군(樂浪君)에 봉해졌는데 고(故) 승지(承旨) 신(信)의 따님이다.

 

 公은 1290년(충렬왕 16년) 경인에 태어나셨다. 8세에 음보(陰補)로 동면도감판관(東面都監判官)이되고, 18세에 비로서 태위왕(太尉王-忠宣王)을 섬겨 원의 서울의(태위왕의) 관부에서 발탁되어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삼았다. 날로 총애를 얻어 王氏의 성(姓)을 하사받고 이름을 주(鑄)라 고쳤다. 중문부사(中門副使)로 전임되고 다시 전부령사복정(典簿令司僕正) 농화우윤(農華右尹)의 직에 옮겼다. 그후 관계(官階)는 봉상(奉常)을 거쳐 봉순대부(奉順大夫)에 이르니 임금이 더욱 귀하게 여겨 밀직대언(密直代言)으로 특별히 제수하니(特除) 公이 사양해 가로되 신(臣)이 나이가 어리고 아는것이 없는데도 삼품(三品)에 오르면 많은 비난을 받을 것 입니다. 무릇 왕명을 출납하는 직책은(承旨) 청렴하고 명망있는(淸望) 다른사람으로 가려서 쓰소서 하였다.

 

 그로인하여 임금의 뜻을 거슬리게 되어(王旨) 옛 성과 이름을 되돌려 받고 벼슬을 깎아 철주(鐵州-평북 철산군)의 원으로 내려가니 그것은 至大元年(충선2, 1310년) 8월이었다. 철주를 다스린지 4년에 공사(攻事)는 간소화하여 백성을 편하게 하였다. 皇慶二年(충선5, 1313년)에 임금(충선왕)과 지금의 임금(충숙왕)이 본국으로 돌아오자 公이 압록강까지 올라가서(鴨頭江上) 맞이하니 임금이 그를 대하기를 옛과 같이하면서 함께 王京으로 돌아가 전의령(典議令)겸 중문부사밀직대언(中門副使密直代言) 세자우사윤(世子右司尹) 지총부사(知摠部事)로 삼았다.

 

 1316년(충숙왕3년)에 통헌대부밀직부사(通憲大夫密直副使) 좌상시상호군(左常侍上護軍)이 되고, 1317년에 밀직사(密直使)에 오르니 품계가 광정(匡靖)이 되었으며 상의평리(商議評理)가 되었다. 至治元年(충숙8, 1321년)에 임금을 수행하여 원나라에 가니 그때 태위왕(충선왕)이 변방(토번)에 있고 금왕(今王)이 또한 원나라에 있는 틈을타서 역적의 무리들이 종사를 엎으려고 했다. 그러자 임금을 따라간 대신들 또한 모두 마음을 바꾸어서 대세를 예측 할 수 없게되었다.

 

그러나 公은 홀로 임금의 좌우에서 끝내 다른 마음을(二心) 품지 아니하니 조정의 식견있는 자들이(朝庭識者) 모두 칭송하였다. 1324년(충숙11)에 태위왕(충선왕)이 서쪽에서 돌아와 작위를 회복하게 되고,  公에게 추성좌리공신(推誠佐理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판민부사(判民部事) 상호군(上護軍)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 충원공(忠元公)의 시호를 내렸다.

 

 이듬해 임금(충숙왕)이 귀국하게 되니 부왕이 작별하면서 임금에게 이르기를 충(忠)은 세록구가(世祿舊家-대대로 나라에서 녹봉을 받으며 대를이어온 집안)요. 또한 왕실의 외척이며 근자에는 나라를 구하고 바로잡는데 광구(匡救)의 힘을 다하였으니 그는 다른 신하에 비할바 아니며 마땅히 그의 말을 믿어야 할것이다 하였다. 또한 公에게 타이르며 말하기를  그대는 영구히 마음에 굳게 새겨 왕을 보필하라 하였다.

 

 그러나 귀국한 뒤 참소하는 말이 들어가 임금이 멀리하게 되니 5년을 한가히 지내다가 1330년(충숙17)에 전왕(前王-충혜왕)이 다시 왕위를 이으니 公을 다시 기용하여 前職인 판군부감찰사사(判軍簿監察司事)에 임용하였다. 지금 임금(충숙왕)이 원에 들어가자 겨울에 公이 사신으로 새해를 축하하는 글(賀年表)을 받들어 원나라에 들어간지 3년에 임금(충숙왕)이 다시 복위하고 前王(충혜왕)이 원으로 入朝하니 그로인하여 관직을 그만두고 원나라 서울에 머루르다가 元統2년(충숙복위3, 1334년)에 황제의 명을받아 호부(虎符)를 차고 무관직인 무덕장군(武德將軍) 서경등처(西京等處) 수군만호(水軍萬戶)겸 제조정동도진무사사(提調征東都鎭撫司事)가 되고 1336년(충숙복위5)에 징경원차사(徵敬院差使)가 되어 고국에 돌아왔으나 그로부터 정사(政事)에 뜻이 없어 전원에서 지내다가 이듬해에 병이들어 치료에 효험이 없어 5월 己酉에 卒하니 춘추 四十八歲였다.

 

 公은 천성이 단정하고 진실하였으며(端實) 마음이 넓어 큰 변을 당하여도 흔들림이없었다. 대언(代言)의 벼슬을 스스로 사퇴한것도 그 뜻은 지나침을 꺼려했기 때문이고 임금을 섬김에 충절을 다하였거늘 방강거지(方彊遽止)하니 아아 그것이 天命이 아니던가.

 

 부인 홍씨는 변한국대부인(弁韓國大夫人)에 봉해지니 아버지는 고(故)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규(奎)이며, 임금의 德妃(충숙왕비 명덕태후-충혜왕과 공민왕의 母)에게는 언니가 된다.

 

 三男을 낳았으니 호(顥)는 전 흥위위호군(前 興威衛護軍)이오, 후(翊)은 비순위별장(備巡衛別將)이오 의(顗)는 아직 벼슬하지 않았다.

 

 五女를 두었으니 一女는 친어군별장(親禦軍別將) 金光利에게 출가하였고, 二女는 좌우위호군(左右衛護軍) 洪瑜에게 출가하였고, 三女는 관고려만호(管高麗萬戶) 羅英傑에게 출가하였고, 四女는 정윤(正尹)  왕서에게 출가하여 나라의 종친이 되었고, 五女는 어려서 미혼이었다.

 

명(銘)하되

 

천도(天道)가 편치않아 만사(萬事)가 양전(兩全)키 어려우니

벼슬과 목숨을 어찌 가히 하늘에서 모두 바랄것인가.

이미 富와 貴를 얻었으나 얻지 못한것은 수명(壽命)이었으니

어찌 天命을 아는자 더블어 자연을 논함을 얻으리오.

 

                                    찬성사(贊成事)  최 해(崔瀣) 지음

 

有元故武德將軍西京等處水手軍萬戶兼提調征東行中書省都鎭撫司事高麗宰相元公墓誌 崔 瀣

 

王京之南距城三十里有山蜿蜒若行若伏若顧而住水自艮涓涓潜洩至坤流爲溝瀆合大江入于海背山面水宅得其勢不曰蓄德之丘乎茲故征東萬戶宰相元公之藏藏用後至元丁丑六月丁酉其里人崔某受諸孤之謁不敢拒直叙公且爲銘詩以慰其孤之心焉叙曰諱忠字正甫先世盖新羅北原人十一代祖克猷始仕本國爲正議大夫祖諱傅相忠烈王爲僉議中贊謚文純考諱瓘故僉議贊成事大夫人金氏封樂浪郡故承旨諱信之女也公生於至元二十七年庚寅八歲以廕補東面都監判官十八始召入事太尉王於京師之邸擢授禮賓內給事日見寵愛賜姓王氏改名曰鑄遷中門副使轉典符令司僕正穠華右司尹階由奉常至奉順大夫而王益欲貴異之特除密直代言公辭曰臣齒少無知驟登三品取譏多矣若夫喉舌之任淸望攸屬願乞擇人因忤王旨命復其姓名降職知鐵州促登之實至大三年八月也理鐵四年政簡而民便之皇慶二年王及今王歸國公迎拜鴨江待遇如初命從歸王京授典儀令兼中門副使密直代言世子右司尹知惣部事延祐三年拜通憲大夫密直副使左常侍上護軍七年陞密直使階匡靖尋出爲商議評理至治元年從王朝天子所時太尉王有吐蕃之行又見留京師傾危之徒謀覆宗社從行大臣亦皆革面勢至不測公獨左右於王終始無二心朝廷識者稱之至泰定元年太尉王得西廻王復爵授公推誠佐理功臣重大匡僉議贊成事判民部事上護軍明年王就國父王臨辭目王曰元忠是世祿舊家且連外戚近又盡匡救之力非他臣比宜聽其言又戒公曰尒亦永肩乃心以輔於王然而自歸國後言入見疎閖居五年至順元年前王嗣封起公任以前職陞判軍簿監察司事而今王入朝冬公奉賀年表赴都至三年王又復位而前王入朝因替職留都下元統二年欽受宣命帶虎符爲武德將軍西京等處水手軍萬戶兼提調征東都鎭撫司事至後至元二年奉徽政院差使乘馹東歸自是見事至無可奈何而志在求田問舍而己明年遘疾召醫無驗至五月己酉不起春秋四十有八公天性端實胷無堂府處事之變若有學然其始辭代言意在忌滿至治戴君又執不移之節事出誠心俱亦可尙一時之人皆謂之良宰相而方强遽止鳴呼其不謂之命也何媲室洪氏封南陽郡夫人考故南陽府院君諱奎於王德妃爲女兄也三人曰顥前興威衛護軍曰翊備巡衛別將顗未仕女五人長適親禦軍別將金光利次適前左右衝護軍洪瑜次適管高麗軍萬戶羅英傑次適正尹王諝爲國宗季幼在室銘曰 吁其道無偏物以兩全得位又得壽豈可多責天公旣貴富矣所未究在年安得知命者與之論自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