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4~1366년)

원송수(元松壽)는 과거에 급제1)해 춘추수찬(春秋修撰)으로 보임되었다. 충혜왕이 서연(書筵)에 행차했을 때 안진(安震)이,

 

“저희들이 양부(兩府)에 관원을 충원했으나 아직은 하루 종일 모시고 시강하기에 충분치 못하니 단아한 선비[端士]를 택하시어 주상께서 질문하실 때 대비하도록 하십시오.”라며 원송수 및 민식(閔湜), 판삼사사 이제현(李齊賢) 등을 천거하였다. 또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

 

“하자가 있는 옥은 반드시 좋은 장인(匠人)이 잘 다듬은 뒤에야 보배가 되기 마련입니다. 임금인들 어찌 모든 일에 실수가 없겠습니까? 그러니 좋은 신하가 흉금을 털어놓고 성의껏 인도한다면 성덕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원송수는 중찬(中贊) 원부(元傅)의 증손이며 재상 원선지(元善之)의 아들로서, 저희들이 시강에 불참할 때는 그 사람을 항상 곁에 있도록 하여 도의(道義)를 연마하십시오.”

 

왕이 그 말을 좇았다. 충목왕 때 헌납(獻納)을 지내면서 같은 헌납 곽충수(郭忠秀)와 함께, 찬성사(贊成事) 정천기(鄭天起)가 고신(告身)이 나오기도 전에 바로 정방(政房)에 들어가 인물을 판정했고, 또 자신의 처를 버려둔 채 항상 창기(倡妓)의 집에서 지낸다고 탄핵했다. 왕이 노하여 원송수 등을 옥에 가두고 국문하자, 재상과 대간(臺諫)이 대궐에 나아가 구하려 했으나 끝내 파직되고 말았다.

 

충정왕 3년(1351)에 서해도 안렴사(西海道按廉使)로 나갔다. 공민왕이 즉위해 귀국하자 원송수가 길에서 영접했는데, 풍채가 준수하고 행동이 법도에 맞았으므로 왕은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닌 줄을 알고서 바로 내서사인(內書舍人) 겸 좌부대언(左副代言)으로 발탁해 국가의 기밀을 맡겼다. 나날이 신임이 더해져 지주사(知奏事)로 전임되어 관리의 선발과 임명에 참여했을 때는 관작과 상벌[名器]의 수여를 조금의 사사로움도 없이 신중히 행했다. 왕이 한번은 승려에게 관직을 주려고 그를 불렀더니 병을 핑계하여 가지 않았다.

 

또한 윤택(尹澤)이 왕을 추대하는 일에 공을 세웠다고 하여 그의 손자 두 명을 능단직(陵壇直)에 보임하라고 명했으나 원송수는 그 중 한 명만 기록하였다. 뒷날 왕이 그 이유를 묻자 궐석된 자리가 적기 때문에 왕의 뜻을 다 이행할 수 없었다고 대답했는데, 윤택은 원송수의 좌주(座主)였다. 이 일로 왕은 그를 더욱 공경하고 중히 여기게 되어, 원송수가 오는 것을 보면 반드시 일어나서 그를 기다렸다. 처의 상을 치르고 있을 때에 나와서 업무를 보라는 왕명이 내리자 원송수는,

 

“승선(承宣)이 저 하나 뿐만이 아니고 게다가 상을 치르는 중에 업무를 보는 것은 옛날의 의례에도 없던 일입니다.”라고 아뢰니 왕이 옳은 말이라 여겼다. 공민왕 10년(1361) 왕이 홍건적을 피하여 남쪽으로 피난갈 때 원송수가 호종했다. 당시 감찰사(監察司)가 어떤 일로 목인길(睦仁吉)을 탄핵했는데, 목인길은 환관과 함께 왕에게 참소해 대관(臺官)으로 하여금 개성에 따로 분사(分司)를 설치해 일을 맡게 함으로써 탄핵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원송수가 극력 안 된다고 주장해 결국 그 일은 중지되었다. 그 후 홍건적이 평정되자 호종한 공을 기려 일등공신으로 책봉했다.

 

원송수가 국가의 기밀을 8년 동안 맡으면서 항상 근심과 두려움을 품고 있다가 이때에 와서 눈물을 흘리며 교체를 간청했다. 왕이 “경과 같이 능력이 있는 사람을 직접 천거하면 교체해도 좋다.”라고 하기에 이강(李岡)을 자기 대신 천거했다.

 

이후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 임명되고 충근찬화공신(忠勤贊化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14년(1365)에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임명되었으나 얼마 후에 신돈(辛旽)의 비위를 거슬러 파직되었다. 이듬해에 신돈이 더욱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자 근심과 울분으로 병이 나 마흔세 살로 죽었다.

 

그는 재상으로서의 기량을 갖추었기에 나라 사람들이 다들 애석하게 여겼다. 왕은 해당 관청에 명해 그를 장사지내도록 했으며 관등을 올려 주고 시호를 문정(文定)이라고 하였다. 아들은 원서(元序)와 원상(元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