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8~1339년)

삼한국대부인 김씨(三韓國大夫人 金氏) 묘지명 및 서문

삼중대광 김해군 영예문관사(三重大匡 金海郡 領藝文館事) 이제현(李齊賢) 지음.

 

대부인은 김씨(金氏) 성으로, 세계(世系)가 해양군(海陽郡)에서 나왔다.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金紫光錄大夫 叅知政事) 연(鍊)의 딸이고, 조청대부 대장군(朝請大夫 大將軍) 평(坪)의 손녀이며,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金紫光錄大夫 叅知政事) 원의(元義)의 증손이다. 조산대부 추밀원좌부승지(朝散大夫 樞密院左副承旨) 유홍(庾弘)의 외손이며, 추성진력안정공신(推誠陳力安定功臣) 삼중대광 남양부원군(三重大匡 南陽府院君) 홍규(洪奎)의 부인이다.

 

선량하고 현명하며 자애로우면서도 엄격하고 몸가짐이 예의를 벗어난 적이 없어 비록 친형제라도 일찍이 문지방을 넘은 적이 없었다. 더불어 말을 해보면 아내의 도리가 갖추어져있고 어머니의 법도가 완전하였으므로, 가법(家法)을 논하는 자들이 으뜸이라고 칭찬하였다. 82세인 후지원(後至元) 5년(충숙 복위 8, 1339) 8월 신묘일에 돌아가셨다. 11월 임신일에 송림현(松林縣) 홍▨원(洪▨原)에 있는 부원군(府院君)의 무덤에 합장하여 장례를 지냈으니, 예(禮)에 따른 것이다.

 

▨▨▨▨▨▨▨▨▨<1남 5녀를 낳았으니, 아들 융(戎)은> 무덕장군(武德將軍) 전라진변만호 대광 삼사사(全羅鎭邊萬戶 大匡 三司使)이다. 장녀는 원 좌승상(左丞相) 아홀대(阿忽台)에게 시집갔고, 2녀는 찬성사(贊成事) 정해(鄭瑎)에게 시집갔으며, 3녀는 덕릉(德陵, 忠宣王)의 현비(賢妃)가 되었으며, 4녀는 찬성사 원충(元忠)에게 시집갔고, 5녀는 의릉(懿陵, 忠肅王)의 덕비(德妃)가 되어 실로 우리 나라의 뒤를 이은 임금<忠惠王>을 낳았다. 승상(丞相)공은 두 아들이 있으니 별리기보화(別里奇普化)는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고, 자당(自當)은 동지휘정원사(同知徽政院使)가 되어 이름이 천하에 높았다. 나머지 여러 자손들도 모두 벼슬을 나란히 하니 가문의 성함이 고금에 비길 바가 없었다.

 

부원군이 세상을 떠나자 혼자 20여 년 거처하였는데, 측실[姬媵]이 그 ▨▨에 따르고, 무리들이 그의 뜻에 복종하였으며, 부하고 장수하고 강령(康寧)하여 평생이 한결 같으니, 아, 아름답도다.

 

명(銘)하여 이른다.

남양부원군이 돌아갔을 때 우리 선친<李瑱>이 실로 묘지명을 지었다. 나는 재주가 없으면서도 문장으로 뒤를 이어 또 대부인의 묘지(墓誌)를 짓게 되었으니, 돌아보건대 우리 부자가 홍씨 가문과 어찌 관련을 가지게 되었는가. 부원군 부부가 훌륭하여 이 글을 쓰기에 부끄러움이 없기 때문이로다.

후지원(后至元) 5년 기묘년(충숙 복위 8, 1339) 11월 일에 세우다.

 

三國大夫人金氏墓誌銘幷序」

      三重大夫匡金海君領藝文館事李齊賢譔」

大夫人金姓糸出海陽郡金紫光祿大夫叅知政事諱鍊之女朝請大夫大將軍諱坪之孫金紫光祿大夫叅知」

政事諱元義之曾孫朝散大夫樞密院左副承旨庾諱▨之外孫推誠陳力安定功臣三重大匡南陽府院君洪」

諱奎之夫人也淑哲慈嚴動無違禮雖親兄弟未甞踰閾與之言婦道備母儀全論家法者稱首焉年八十二卒」

于後至元五年八月辛卯以十一月壬申葬于松林縣洪▨原祔府院君之▨禮也▨▨▨▨▨▨▨▨德▨▨」

全羅鎭邊萬戶大匡三司使女一適」

皇元左丞相阿忽台次適賛成事鄭瑎次爲」

德陵賢妃次適賛成事元忠次爲」

懿陵德妃實生我」

嗣王丞相公兩子▨里奇普花爲御史大夫自當爲同知徽政院使名重天下諸餘子姓並列靑紫門戶之盛古」

今未有府院君卒獨處二十餘年姬媵遵其▨▨黨服其義富壽康寧哀榮終始嗚呼休哉銘曰」

南陽府院君之終也吾先君子實爲墓銘余以不材嗣爲文而又誌大夫人之塋顧余父子何有於洪氏之門府」

院君夫婦之賢盖無媿於斯文也」

后至元五年已卯十一月 日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