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현의 흔적을 찾아서
작성자 푸른바위
작성일 2019-01-13 (일)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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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사익(21세, 계사보 2권 593면)의 배위 탐색
선현의 자취를 찾는 데는 우리 삼계가 합심 협력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래의 자료를 공유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자료의 아래에 적었습니다. 자암 김구 묘비명입니다.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통정대부 홍문관부제학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편수관(通政大夫 弘文館副提學 知製敎 兼 經筵參贊官 春秋館編修官)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동지 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贈 嘉善大夫 吏曹參判 兼 弘文館提學 藝文館提學 同知 經筵 義禁府 春秋館 成均館事) 자암김선생묘비명(自庵金先生墓碑銘) 병서(幷序)
후학(後學) 통정대부(通政大夫) 성균관대사성 지제교(成均館大司成 知製敎) 김세렴(金世濂)이 글을 짓는다.

공(公)의 휘(諱)는 구(絿), 자(字)는 대유(大柔)요, 광주(光州)사람이니 기묘선현전(己卯先賢傳)에 이른 바 자암(自庵) 김(金)선생이다. 공은 타고난 천성이 뛰어나게 높고 행실 또한 독실하여 어려서부터 분발하여 힘써 행하니 그와 함께 학문을 연구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모두 당시의 훌륭한 무리들이었다. 중종(中宗)이 바야흐로 문치(文治 : 문교와 예악으로 다스림)에 확고한 뜻을 가지고 이 세상을 새롭게 만들고자 하는데 공과 정암(靜庵) 조(趙)선생, 충암(沖庵) 김(金)선생이 위아래에서 의지하고 존중받는 바가 있었다. 힘을 모와 임금을 돕고 지치(至治 : 교화가 이루어지는 안정된 정치)를 회복하기를 도모하여 임금과 백성을 요순(堯舜)시대와 같이 만들고 유학을 흥기시키는 것을 자기의 책무로 삼았다.
처음에 괴원(槐院 : 승문원)을 거쳐 홍문관에 선발되어 들어가 정자(正字)가 되었고 저작(著作), 박사, 수찬(修撰), 교리를 역임하였다. 오래지 않아 이조좌랑에 임명되고 정랑으로 옮겼다. 사간원 헌납(獻納), 사간, 장악원 정(掌樂院 正)을 거쳐 다시 홍문관에 들어와 응교(應敎), 전한(典翰), 직제학이 되었는데 항상 예문관 응교와 성균관 사성의 직책을 겸하였다. 휴가를 받아 호당(湖堂 : 독서당)에서 독서하였고 승정원 동부승지에 승진하였다가 좌승지가 되었으며 옮겨서 직제학에 임명되었다.
얼마 있다가 북문(北門)의 화(禍)가 일어나니 곧 기묘년(1519년) 11월 15일이었다. 공과 정암, 충암이 하룻밤사이에 함께 옥관(獄官)에게 내려가게 되었다. 이에 앞서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이 공론(公論)에 의해 버림을 받자 분노를 쌓고 원한을 품고 은밀하게 대역죄로 무고(誣告)를 하였으니 일을 예측할 수 없었는데 대신(大臣) 정광필(鄭光弼)이 힘써 구제함에 힘입어 차등 있게 나누어 형벌을 받아 사방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공은 곤장형(棍杖刑)을 받고 개녕(開寧)에 유배되었는데 몇 달이 지난 후 죄를 더하여 남해(南海)로 유배되었고 정암과 충암은 마침내 명령이 더해지는 것(사약을 내리는 명령)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아아! 슬프다. 기묘년의 선비들은 진실로 충성을 다하는 곧은 도리가 있었으나 [세상에] 나아가서는 밝은 임금을 만나지 못하였으며 선을 즐기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나 물러나서는 능히 홀로 자기의 몸을 잘 지키지 못하여 재난과 곤궁함으로 일생을 마친 사람들이다. 공과 같은 경우에 충성은 충분히 임금의 인정을 받을 만 하였으나 성명(聖明 : 훌륭한 임금의 태평성대)의 시대에서 축출되었으며 지혜는 충분히 몸을 보전할 만 하였으나 마침내 교활한 사람의 함정을 만났으니 이 또한 어찌 된 것인가? 슬프다! 천도를 반드시 기필할 수 없는 것이 여기에 이르렀는가?
공은 외딴 섬에서 십삼 년간 있다가 비로소 임피(臨陂)에 옮겨지고 이년 뒤에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 왔다. 유배 중에 부모가 모두 먼저 돌아가셨는데 이때에 이르러 부모님의 묘에 가서 곡(哭)을 하고는 혼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나서 추세(追稅 : 나중에 부모의 상복을 입는 것)의 정을 펴고자 하여 아침저녁으로 산소에 올라가니 눈물 흘리는 곳의 초목이 모두 말라 버렸다.
가정(嘉靖) 갑오년(1534년) 11월 16일에 병으로 돌아가시니 향년 47세이다. 예산(禮山) 종경리(宗敬里)의 남향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선영(先塋)을 좇은 것이다. 57칠 년 뒤 선조(宣祖) 때에 특별히 이조참판을 증직 받았다.
공은 문장이 보기 드물게 걸출하여 위진(魏晉)시대의 글보다도 더욱 우뚝하였으며 재주가 예능에도 두루 미쳐서 음률을 자세히 이해하였으니 장악원 정에 임명한 것은 아악(雅樂)을 바로 잡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16세에 한성시(漢城試)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20세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했으며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마시에 응시했을 때 시험관이 여러 번 감탄하고 칭찬하며 그 시험지에 의견을 쓰기를 “한퇴지(韓退之 : 당나라의 문장가 한유)가 글을 지었고 왕희지(王羲之 : 동진의 서예가)가 글을 썼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생원과 진사, 두 과거에서 모두 장원을 하였으니 나라에 드문 일이었다.
필법은 강건하고 스스로 일가를 이루어 세상에서 인수체(仁壽體)라 일렀으니 이는 공이 인수방(仁壽坊)에 살았기 때문이다. 뒤에 중국 사람들이 사 간다는 말을 듣고 그만두고 쓰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세상에 전하는 것이 드물다.
아버지의 휘(諱)는 계문(季文)이니 대흥(大興)현감을 지냈고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성원(性源)은 성균관 사예(司藝)를 지내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증조부 예몽(禮蒙)은 예조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어머니 숙부인(淑夫人) 전의이씨(全義李氏)는 고려 태사(太師) 도(棹)의 후손이다.
김해김씨(金海金氏)를 맞이하였으니 만호(萬戶) 진현(震賢)이 그 아버지이다. 부인의 도리를 능히 지키고 내외가 모두 아름다워 훌륭한 자손을 길러냈다. 이남일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용(鎔)인데 일찍 죽고 차남 균(鈞)은 진사시(進士試)에 장원급제하였다. 딸은 전력부위(展力副尉) 이사항(李思航)에게 출가하였다. 균(鈞)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사간원 헌납(獻納) 온(韞)이고 차남은 별좌(別坐) 합(韐)인데 효행으로 지평(持平)에 증직되었고 용(鎔)의 후사를 이었다. 딸은 순계군(順溪君)에 증직된 안세복(安世復)에게 출가하였다. 이사항(李思航)은 일남을 낳았으니 직장 희용(希容)이다. 온(韞)은 이남일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만호 발(橃)과 통정대부(通政大夫) 군수 황(榥)이고 딸은 윤덕경(尹德敬)에게 출가하였는데 측실(側室)의 소생이다. 합(韐)은 2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현감 숙(橚)이고 차남은 선무랑(宣務郞) 건(楗)이며 장녀는 현령 이영의(李榮義)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첨지(僉知) 이진형(李晋亨)에게 출가하였다. 안세복(安世復)은 사남삼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생원 몽익(夢益), 순양군(順陽君) 몽윤(夢尹), 선무랑 몽척(夢陟), 통덕랑(通德郞) 몽상(夢尙)이고 딸은 선비 신대근(申大根), 참봉 원사익(元士翼), 주부 홍형(洪逈)에게 출가하였다. 내외의 증손과 현손(玄孫)이 모두 백여 명이다.
유학(幼學) 백휘(伯輝)는 숙(橚)의 소생으로 이 사람이 종손(宗孫)이 되었는데 순양군 및 여러 종인(宗人)들과 묘비에 글을 새겨 세우기로 계획하고 직접 가장(家狀 : 선조의 행적을 기록한 글)을 써가지고 김세렴(金世濂)에게 부탁하기를, “공이 돌아가신지 백여 년인데 비석이 아직도 없으니 어찌 유독 자손만 책망하겠습니까? 그 것은 유림(儒林)에 있어서도 잘못된 것이 또한 큽니다. 그러니 그대가 아니면 누가 명(銘)을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세렴이 사양했으나 어쩔 수 없어서 삼가 명한다.
명(銘)하노니,

도학(道學 : 성리학)의 흥성은 실로 문정공(文正公 : 조광조)이 일으키니
띠를 뽑음에 다른 뿌리도 딸려 뽑혀(어진 사람끼리 서로 이끌어 천거함) 군자의 도가 왕성해졌네.
진실로 선생은 조예가 이미 깊은 경지에 들어가
훈지(壎篪 : 훈과 지라는 악기의 합주 = 형제의 화목을 가리킴)처럼 번갈아 응하니
그 날카로움은 쇠를 벨 것 같았도다.
의리를 공경하고 좌우에서 보좌하여 오직 올바른 것을 기뻐하니
행함에 어려움이 있어도 그 법도를 고치지 아니하였네.
여러 흉악한 무리들이 미워하여 교묘하게 모함하는 것이 끝이 없더니
위급한 고비에 마침내 놀라고 두려워하여 귀신과 물여우(간사한 사람이 남을 해침)가 되 었구나.
하늘이 장차 도(道)를 없애려 하여 위대한 사람이 죽었고
[공은] 외딴 곳에 몸을 던져 죽을 때까지 궁벽한 시골에서 있었네.
공론(公論)이 한번 정해지는 것 백년도 걸리지 않아서
사림(士林)에서 존경받아 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었네.
공덕을 기리는 큰 비석에 크게 전액(篆額)하여 묘소를 드러냄에
새긴 글씨 무궁하리니 공(公)이 어찌 유감있으랴?

황명(皇明) 숭정(崇禎) 13년 경진(16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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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금석문 종합영상종보 시스템"에서 "김구 묘비 金絿墓碑"를 찾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안씨네 족보에서 다시 정확한 내용을 확인하셔야 하겠습니다.

2019. 1. 13. 시중공계 종사연귀위원회 부위원장 대연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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