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현의 흔적을 찾아서
작성자 용호-천안
작성일 2013-06-10 (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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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원씨(元氏) 관련 마을

전북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석정(石井)마을

 

본래 남원군(南原郡) 기지면(機池面) 옹정리(甕井里) 지역으로 항아리처럼 생긴 우물이 있어 독우물 또는 옹정(甕井)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고룡리(古龍里), 호산리(狐山里)의 각 일부와 주포면(周浦面)의 제천리(諸川里) 일부를 병합하여 옹정리(甕井里)라 하고 옹정리에 편입되었는데 1972년 옹정리의 동편 마을을 금정(金井), 서편 마을을 석정(石井)으로 분리하였다. 1919년 창산리에 있던 면사무소가 옮겨와 면 소재지가 되었다.

 

석정(石井)마을은 최초 통일신라 초기에 원주 원씨(原州元氏)가 처음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온다. 지금의 요천수가 마을 뒷산 밑을 굽이 돌아 흘렀는데 이때 흥덕 장씨 제각이 세위진 부근에서 낚시질을 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김씨, 장씨. 양씨 기타 성씨가 모여들어 오늘의 큰 마을을 이루고 있다.

 

원씨 일가가 많이 모여 사는 속칭 큰 골목부근에 맑고 시원하여 제아무리 가물어도 물줄기가 끊이지 않은 남원 제일의 샘이 있으니 이 샘이 유명한 옹정(甕井)이다. 어느 샘이고 항아리처럼 생긴 것은 공통적이지만 이 곳 샘이 유달리 항아리 속에 또 항아리가 있는 것 처럼 생겨 이로 인해 독우물, 돋우멀로 불렀는데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항아리 옹()과 우물 정()으을 써서 옹정(甕井)으로 바꾸었다. 1972년 행정분리에 따라 옹정리의 동편마을을 금정(金井)이라 하고 서편을 석정(石井)이라 했다.

 

1919년 창산리에 있던 면 청사가 화재를 입어 전소 되어 면청사를 다시 지을때 지금의 옹정리로 옮겨 면소재지로서의 행정, 교육의 중심지로 발돋음하게 되었고 1995년도에는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으로부터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포항시 북구 기계면 문성동(文星洞)

 

문성동은 신라 중기 원씨(元氏)에 의해 개척된 마을로서 기계(杞械) 고을의 소재지로 원문동(元門洞)이라 불리웠다. 그후 조선 중기 숙종 때 이름난 명장이 지금 문성 뒷산 성산(城山)에서 군사전술용으로 목마(木馬)를 만들어 성을 쌓았다 하여 이 동리를 문성(文城)이라 하였다.

 

그 후 지금부터 150년 전 이 마을 부호이며 선비인 홍에 의해 문성(文星)으로 개칭되어 현재까지 행정이동명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또다른 설화에 의하면 번창하던 문성동(文星洞)이 냇물 줄기의 변화로 농토가 유실되어 많은 사람들이 현내동으로 이사를 가버려 동세가 날로 쇠약해 져가고 있을 때 하늘에 문창성(文窓星)이 나타나 길조라고 하여, 마을에 큰 인물이 나고 동네도 번창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동명(洞名)을 문성동(文星洞)으로 고쳤다 한다. 문성동에는 92가구 324명이 살고 있으며 성씨는 남영 홍씨가 주성이고 밀양 박씨 영천 이씨 등이 거주하고 있다.

 

 

충북 청주시 상당구 탑동에 있는 당고개의 지명 유래 전설

 

통일신라 때 서원경(西原京)으로 향하는 고갯마루의 양쪽 길가에 객줏집이 마주하고 있었다. 북쪽에 위치하고 있던 객줏집의 주인은 함씨(咸氏)였고, 남쪽에 있던 객줏집의 주인은 원씨(元氏)였다.

 

추운 어느 겨울밤에 함씨의 객줏집 문을 두드리는 젊은 여인이 있었다. 함씨는 문을 열고 여인을 보았다. 여인의 몸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얼굴에는 온통 종기가 퍼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은 몰골이었다. 여인은 함씨에게 헛간이라도 좋으니 추위를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함씨는 여인을 모질게 내쫓았다. 잠자리를 거절당한 여인은 원씨의 객줏집 문을 두드렸다. 대문을 열고 나온 원씨는 여인을 측은하게 여겨 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할멈을 시켜 약을 달이고, 또 따뜻한 밥을 짓게 하는 등 여인을 극진히 보살폈다.

 

원씨 부부의 정성으로 여인은 금새 기력을 되찾았고, 목욕을 하고 싶다는 부탁을 했다. 이에 할멈은 커다란 가마솥에 물을 가득히 데워 여인의 몸을 씻어주었다. 그러자 우아한 풍악소리가 방안 가득 울리면서 무지개가 은은히 떠올랐다. 여인의 몸은 어느덧 하얀 살결을 띠었고, 고결한 향내가 진동했다.

 

목욕을 마친 여인은 원씨 부부에게 조그마한 당을 세워 놓고 부처님을 모시면 장차 자손에게 영화가 깃들 것이다고 말한 후 홀연히 사라졌다. 그제야 원씨 부부는 여인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여인이 말한대로 뒷마당에 조그마한 당을 세워 놓고 부처님을 받들었다.

 

이후 함씨의 객줏집은 가세가 점차 기울었지만, 원씨의 객줏집은 겹겹이 경사에 자손들까지 출세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고향인 경기도 용인으로 되돌아가 마지막 생애를 마쳤다. 원씨 부부가 떠난 뒤에도 주변 사람들이 뒤를 이어 부처님을 숭상하고 복을 받았다. 그래서 이곳을 당고개로 부르고 있다.

 

오늘날에는 비록 당()의 잔존 형태만 엉성하게 남아 있지만, 아직도 고로(故老)의 할머니들은 집안에 우환이 있을 때마다 이곳에서 고사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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