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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용호-천안
작성일 2013-07-17 (수)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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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충보국(盡忠保國)한 용장(勇壯) 원균, 이제 흑백논리에서 탈피,,,
제1회 임진포럼 ‘원균과 옥포해전 재조명’-이정일 박사 발표 지상중계

<정리 임봄기자>

 

진충보국(盡忠保國)한 용장(勇壯) 원균, 이제 흑백논리에서 탈피 ‘객관적 평가’ 필요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으로 기록된 옥포해전의 주역인 원균 장군과 옥포해전을 재조명하는 ‘제1회 임진포럼’이 5월 16일 오후 5시 평택시남부문예회관 세미나실에서 개최됐다. 
지역의 정체성을 제고하기 위해 ‘평택시민아카데미’가 주최하고 ‘평택시사신문’과 ‘원주원씨대종회’가 특별후원으로 참여한 이날 포럼은 1980년대 초 원균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 전.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정일 박사를 초청해 원균 연구에 대한 지역사회의 이해와 관심을 높이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날 포럼을 이끌어간 이정일 박사는 1980년대 초 조선 후기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로는 처음으로 <원균론>을 발표해 그동안 부정적인 인식으로 저평가 받았던 원균을 재조명하는데 불씨를 지폈다. 저서로는 <임진왜란 연구> <광해군 연구>와 조선후기 전쟁사에 관련된 다수의 논문이 있다. 
다음은 이정일 박사의 포럼 발표와 발표문을 중심으로 정리·요약한 내용이다.                   - 편집자 주 -


우리는 두 사람의 영웅을 동시에 잃어버리고 있다.
이순신은 신이, 원균은 악마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너무 오랫동안 많은 영웅들을 잊고 살아왔는데 그 대표적인 영웅이 바로 원균 장군이다. 유성룡이 임진왜란 후에 쓴 <징비록懲毖錄>에서부터 이순신 장군에 대한 숭모는 시작됐다. 역사적으로 강적인 일본을 의식하는 동안 민족의 구국영웅으로 추모돼 오던 이순신은 특히 일제강점기 단재 신채호에 의해 ‘성웅 이순신’으로 격상됐고 이어 설의식·이은상 등에 의해 ‘민족의 태양’으로 신격화됐다. 이에 따라 그의 경쟁자였던 원균은 상대적으로 점점 더 ‘악인’에서 ‘악마’의 수준으로 떨어져갔다.
임진왜란 당시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급박한 상황 아래 많은 영웅이나 열사들이 민족과 국가를 구하기 위해 벌떼처럼 일어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忠과 용勇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조선의 장군, 그것도 전략상 최고의 요충지를 책임지도록 선발된 장군이 어떻게 기생과 술판만 벌이다가 적이 나타나면 기를 쓰고 도망만 쳤겠는가.
원균은 당시 조선 수군편제로 볼 때 이순신보다 훨씬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경상좌수사 박홍 다음가는 경상우수사직으로 이순신이 명령불복종 죄로 잡혀 올라간 후에는 경상우수사 겸 경상도통제사로 임명돼 이순신을 대신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이러한 인물을 형편없는 겁쟁이나 모함 꾼으로 만들어버린다면 그것은 잘못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원균을 악역으로 설정하면 첫째, 조선 수군 전체의 수준이 문제가 되고 둘째, 당시 위정자들을 모두 악인의 후견인이나 무능인으로 만들게 되며 셋째 이순신을 신격화 시키게 된다. 이순신은 신이 아니며 뚜렷한 역사적 인물을 가공의 신화적 인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완전무결한 인격자로 묘사해야만 위대한 영웅을 만들 수 있다는 유치한 발상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두 사람의 역사적 영웅을 동시에 잃어버리고 있다. 이순신은 신이 돼버렸고 원균은 악마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원균에게 맡겨진 악역은 처음부터 잘못된 설정이며 그 결과도 실패한 것이다.


원균은 죽은 후 공신책정 때 ‘선무일등공신’ 3인으로 이순신·권율과 함께 나란히 놓일 수 있었다.

임란 초기 원균의 행적을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임진년에 왕에게 올린 보고서 초안인 <임진장초> <선조실록> 등을 검토해본 결과 원균은 적의 기습을 받자 즉시 인근 우군에게 속보를 발하는 동시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원병을 청하고 흩어진 군사를 수습해 전열을 정비했다. 그가 개전 초기 전선을 이탈했다는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으며 개전 10여일 후에는 벌써 적선 30여 척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고 있었다. 그 후 이순신·이억기·최호 등 원병과 합세해 옥포해전에 참가한 이래 그가 전사한 ‘칠천량해전’에 이르기까지 16차례 해전에 그가 참가하지 않은 전투는 없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가 대단한 전공을 세웠으므로 후일 패사하고 난 후에도 공신책정 때 ‘선무일등공신’ 3인 중 한사람으로 이순신·권율과 함께 나란히 놓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당시 연전연승의 명장으로 인정받아 정2품 정헌대부에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하게 됐던 이순신은 왜 파직되어 사형선고를 받을 뻔 한 지경에 이르렀을까. 그의 죄명을 살펴보면 첫째, 허위보고를 하여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무시한다는 것. 둘째, 조정에서 이순신에게 왜장 가토를 포살하라고 명령했으나 이순신은 적의 간계일지 모른다며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셋째, 임진왜란 초기 원균이 세운공이 많았는데 이순신이 모두 자기 공으로 보고하면서 원균은 공이 없다고 했으며 심지어 원균의 18살 아들이 세운 공도 12살 아이의 허위보고라고 모함했다는 것이다. 넷째, 한없이 방자하여 거리낌이 없다는 것인데 왕을 대신해 세자 광해군이 몇 차례나 남방에 내려가 이순신을 불렀으나 바쁘다는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는 죄명이었다.


<선조실록> 선조의 판결주문에 패전의 책임은 원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첫째는 조정, 둘째는 당시 수군의 제장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칠천량 패전 책임에 관해서는 이미 <선조실록>에 선조의 판결주문이 나와 있는데 그 책임은 원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첫째는 조정에 있고 둘째는 당시 수군의 제장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원래 원균은 수륙병진을 주장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왜적이 우리 수군을 두려워해 해양으로 나오지 않고 산등성이에 웅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원수 권율은 수군 제장들과 뜻이 맞지 않아 틀어박혀 술이나 마시면서 진격을 잃는다는 이유로 원균을 잡아다가 직권으로 징벌을 가했으며 원균은 마지못해 안골포의 적을 그대로 둔 채 부산으로 향했던 것이다.
강제에 의해 진격하고 있던 조선 수군 지휘부는 취약했다. 강경파인 통제사 원균과 이순신의 막료였던 제장들 간에는 전혀 협조가 이뤄지지 않는 상태였으며 지휘권을 확립하지 못한 상황에서 접전을 하게 됐던 당시 수군 제장들은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앞을 다투어 도망치기에 급급했고 이들이 후일 고관대작이 되어 패전의 책임을 전부 원균 한 사람에게만 뒤집어씌우는 일에 가담하게 됐다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원균은 자신의 작전계획과 건의를 묵살당하고 강제에 의해 배후에 적을 둔 채로 오합지졸을 이끌고 진격을 강행했고 정유재침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왜군에게 격파돼 전사했던 것이다.
난이 끝나고 6년이 지난 후인 선조 37년인 1604년 10월 조정에서는 공적심사를 거쳐 이순신·권율과 나란히 선무일등공신 3인 중 한명으로 책정하고 그의 휘하 장수까지도 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 각각 두 명이 선무3등 공신으로 책정된 것은 원균이 처했던 지간의 사정이 이해돼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진충보국하다 전사하고서도 오히려 후인들에게 필주筆誅까지 받아온 그의 고혼孤魂,  이제 달래줄 때가 되지 않았는가.

원균은 논리적인 타당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이 민족적 영웅으로 부각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점점 더 악인이 되어갔다. 아직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지금까지 검토해본 인간 원균은 이순신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순신이 용의주도한 지장이었다면 원균은 저돌적인 용장이었던 것 같다. 누구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도 누구 못지않게 큰 공을 세운 용장 원균, 진충보국盡忠保國하다가 전사하고서도 오히려 후인들에게 필주筆誅까지 받아온 그의 고혼孤魂을 이제는 달래줄 때가 되지 않았는가.
샤머니즘에 등장하는 선신과 악신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고 춘추필법에 의해 전승돼 온 흑백이론이 아직도 우리 주변 인물 평가에 지나치게 적용되고 있으나 이제는 그러한 객관성을 잃은 주관적이고 일방적인 흑백이론에서 탈피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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