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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용호-천안
작성일 2013-07-17 (수)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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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장초 중 옥포해전 장계(이순신 단독 장계)
<임진장초(壬辰狀草)>는 이순신이 조정의 임금님께 올린 보고서 장계(狀啓)의 초본이다.
 
선조가 이순신을 잡아가둔 죄명 네가지는 "조정을 속였으니 임금을 업수이 여긴 죄요, 적을 쫒아 치지 않았으니 나라를 등진 죄요, 거기에다 남의 공을 뺏앗고 또 남을 모함한 죄와 한없이 방자하고 거리낌 없는 죄가 있다."인데, 아래 단독장계는 3번째 죄목인 남(원균)의 공을 빼앗고 또 남(원균)을 모함한 죄에 해당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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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장초 중 옥포해전 장계(이순신 단독 장계)
 
제1차 옥포 승첩을 아룁니다.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은 삼가 적을 쳐서 무찌른 일을 아룁니다.

전날에 받은 분부의 서장에 따라 경상 우수사와 합력하여 적선을 쳐부수러 이 달 5월 4일 축시(01:00~03:00)에 출항하면서 본도 우수사 이억기에게 <수군을 거느리고 신의 뒤를 따라 오라!>고 공문을 보낸 사유는 장계하였습니다.

그 날 그때에 수군의 여러 장수들과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모두 85척)을 거느리고 출항하여 경상우도의 소비포 앞 바다에 이르자, 날이 저물기로 진을 치고 밤을 지냈습니다.

5일에는 꼭두새벽에 출항하여 두 도의 수군들이 지난번에 모이기로 약속한 곳인 당포 앞 바다로 급히 달려갔으나, 경상우수사 원균은 약속한 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신이 거느린 경쾌선으로써 <당포로 빨리 나오라!>고 공문을 보냈더니 6일 진시(07:00~09:00)에 원균이 우수영 경내의 한산섬에서 단지 1척의 전선을 타고 왔습니다. 그래서 왜적선의 많고 적음과 현재 머물고 있는 곳과 접전할 절차들을 상세히 묻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도(경상우도)의 여러 장수들인 남해 현령 기효근, 미조항 첨사 김승용, 평산포 권관 김축 등은 판옥선 2척에 같이 타고, 5일과 6일 사이에 자꾸 잇따라 왔으므로, 두 도의 여러 장수들을 한 곳에 불러모아 두 번, 세 번 약속을 명확히 하고서 거제도 송미포 앞 바다에 이르자, 날이 저물기로 밤을 지냈습니다.

7일 꼭두새벽에 한꺼번에 출항하여, 적선이 머물고 있다는 천성, 가덕으로 향하여 가다가 정오쯤 옥포 앞 바다에 이르니, 우척후장 사도  첨사 김완과 여도 권관 김인영 등이 신기전을 쏘아 사변이 났음을 보고하므로, 왜적선이 있음을 알고 다시금 여러 장수들에게, 『덤벙대지 마라. 태산처럼 침착하라』고 엄하게 전령한 뒤에 옥포 바다에서 대열을 갖추어 일제히 나아가니, 왜선 30여 척이 옥포 선창에 흩어져 대어 있는데, 큰배는 사면에 온갖 무늬를 그린 휘장을 둘러치고, 그 휘장 변두리에는 대나무 장대를 꽂았으며, 붉고 흰 작은 깃발을 어지러이 매달려있고, 깃발의 모양은 번기(펄펄 나부끼는 표시기) 같기도 하고, 당기 같기도 하며, 모두 무늬 있는 비단으로 만들었으며, 바람 따라 펄럭이어 바라보기에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습니다.(왜장 : 도도 다카도라, 정유년에도 참전)

왜적의 무리는 그 포구 안에 들어가 분탕질하여 연기가 온 산을 가렸는데, 우리의 군선을 돌아보고는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제각기 분주히 배를 타고 아우성치며, 급하게 노를 저었지만, 중앙으로 나오지 못하고, 기슭으로만 배를 몰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 6척은 선봉으로 달려나오므로 신이 거느린 여러 장수들은 한결같이 분발하여 모두 죽을힘을 다하니, 배 안에 있는 관리와 군사들도 그 뜻을 본받아 서로 격려하며, 분발하여 주기를 기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동쪽과 서쪽으로 에워싸면서 총통과 활을 쏘는 것이 마치 바람과 우레 같았습니다. 왜적들도 탄환과 활을 쏘다가 기운이 지쳐 배 안에 있는 물건들을 바다에 내어 전질 틈도 없었으며, 화살에 맞아 자는 그 수를 알 수 없고 헤엄치는 자도 얼마인지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제야 왜적의 무리는 한꺼번에 흩어져서 바위 언덕으로 기어오르면서 서로 뒤쳐질까봐 두려워하였습니다.

죄부장 낙안 군수 신호는 왜대선 1척을 당파하고, 왜적의 머리 1급을 베었는데, 배 안에 있던 양날칼, 갑옷, 의관 등은 모두 왜장의 물건인 듯하였습니다. 우부장 보성 군수 김득광은 왜대선 1척을 당파하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사로잡혔던 1명을 산채로 빼앗았습니다.

전부장 흥양 현감 배흥립은 왜대선 2척을, 중부장 광양 현감 어영담은 왜중선 2척과 소선 2척을, 중위장 방답 첨사 이순신은 왜대선 1척을, 우척후장 사도 첨사 김완은 왜대선 1척을, 우부 기전 통장이며 사도진 군관인 보인(군에 직접 복무하지 않는 병역 의무자, 군사비용을 나라에 바침) 이춘은 왜중선 1척을, 유군장이며 발포의 임시 만호인 신의 군환 훈련 봉사 나대용은 왜대선 2척을, 후부장 녹도 만호 정운은 왜대선 2척을, 좌척후장 여도 군관 김인영은 왜중선 1척을 각각 당파하였습니다.

좌부 기전 통장이며 순천 대장인 전 봉사 유섭은 왜대선 1척을 당파하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포로가 되었던 소녀 1명을 산채로 빼앗았습니다. 한후장이며 신의 군관인 급제 최대성은 왜대선 1척을, 참퇴장이며 신의 군관인 급제 배응록은 왜대선 1척을, 돌격장이며 신의 군관인 이언량은 왜대선 1척을, 신의 대솔 군관인 훈련 봉사 변존서와 전 봉사 김효성 등은 힘을 합해서 왜대선 1척을 각각 당파 하였습니다.

경상우도의 여러 장수들이 왜선 5척을 당파하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사로잡혔던 1명을 산 채로 빼앗았습니다. 그래서 합하여 왜선 26척을 모두 총통으로 쏘아 맞혀 깨뜨리고 불태우니, 넓은 바다에는 불꽃과 연기가 하늘을 덮었습니다. 산으로 올라간 왜적의 무리는 숲속으로 숨어 엎드려 겁내지 않는 놈이 없었습니다.

신은 여러 전선에서 사부 가운데서 용감한 자를 뽑아 산에 오른 왜적을 따라가 잡으려고 하였으나, 거제도는 온통 산의 형세가 험준하고, 나무들이 울창하고 무성하여 사람들이 발붙일 수 없을 뿐 아니라, 당장 적의 소굴에 들어 있는데, 병선에 사부가 없으면 혹 위로 포위될 염려도 있고, 날도 저물어 가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영등포 앞 바다로 물러나와 군졸들에게 나무하는 일과 물긷는 이을 시켜 밤을 지낼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시(15:00~17:00)쯤 <멀지 않은 바다에 또 왜대선 5척이 지나간다.>고 척후장이 보고하므로,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이를 쫓아가 웅천땅 합포 앞 바다에 이르자, 왜적들이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사도 첨사 김완이 왜대선 1척을, 방답 첨사 이순신이 왜대선 1철을, 광양 현감 어영담이 왜대선 1척을, 그 부통 소속으로 방답진에서 귀양살이하던 전 첨사 이응화가 왜소선 1척을, 신의 군관인 봉사 변존서?송희립?김효성?이설 등이 힘을 합하여 활을 쏘아 왜대선 1척을 모두 남김없이 깨뜨려서 불태우고, 밤중에 노를 재촉하여 창원땅 남포 앞 바다에 이르러 진을 치고 밤을 지냈습니다.

8일 이른 아침에 다시 <진해땅 고리량에 왜선이 머물고 있다.>는 기별을 듣고 곧 출항을 명하여 안팎에 있는 섬들을 협공으로 수색하면서 저도(돌섬)를 지나 고성땅 적진포에 이르자, 왜의 대선과 중선을 합하여 13척이 바다 어귀에 줄지어 대어 있었습니다. 왜적들은 포구안의 여염집을 분탕한 뒤에 우리 군사들의 위세를 바라보고서는 겁을 집어먹고 산으로 올라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낙안 군수 신호는 그 부통의 소속된 순천 대장 유선과 힘을 합하여 왜대선 1척을, 같은 부통장으로 고을에 사는 급제 박영남과 보인 김봉수 등이 힘을 합하여 왜대선 1척을, 보성 군수 김득광이 왜대선 1척을, 방답 첨사 이순신이 왜대선 1척을, 산도 첨사 김완이 왜대선 1척을, 녹도 만호 정운이 왜대선 1척을, 그 부통장으로 귀양살이하던 전 봉사 주몽룡이 왜중선 1척을, 신의 대솔 군관인 전 봉사 이설과 송희립등이 힘을 합하여 왜대선 2척을, 군관 정로위 이봉수가 왜대선 1척을, 군관 별시위 송한련이 왜중선 1척 등을 모두 총통으로 쏘아 깨뜨리고 불살랐습니다.

그리고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아침밥을 먹고 쉬려고 하는데, 위의 적진포 근처에 사는 향화인 이신동이란 자가 우리 수군을 바라보고 산꼭대기에서 아기를 업고 울부짖으면서 내려오므로, 작은 배로 실어와서 신이 직접 적도들의 소행을 물어보니, 『그 왜적들이 어제 이 포구로 와서 여염집에서 빼앗은 재물을 소와 말에 싣고 가서 그들의 배에 나눠 싣고서는 초저녁에 배를 바다 가운데에 띄워 놓고 소를 잡아 술을 마시며 노래하고 피리를 불려 날이 새도록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이른 아침에 반쯤은 배를 지키고, 나머지 반쯤은 육지로 내려가서 고성으로 향하였습니다. 저의 노모와 처자는 적을 보자, 서로 헤어졌으므로 간 곳을 모르겠습니다.』고 하니, 민망하기 그지없고, 애원하기를 눈물로 호소하므로, 신은 그 정상이 가련하고 적에게 사로잡힐까 염려되어 데리고 갈 뜻을 밝히니, 그 사람은 노모와 처자를 찾아보아야 하기 때문에 따르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장수와 군사들이 이 말을 듣고는 더욱 더 분통을 터뜨리며, 서로 돌아보면서 기울을 돋구어 한마음으로 힘을 합하여 곧 천성, 가덕, 부산 등지로 향하여 적선을 섬멸할 계획을 세워 보았습니다. 그러나 위의 적선이 머물고 있는 곳들은 지세가 좁고 얕아서 판옥선과 같은 큰배로서는 싸우기가 무척 어려울 뿐 아니라, 본도 우수사 이억기가 미처 달려오지 않아서 홀로 왜적 속으로 진격하기에는 세력이 너무나 외롭고 위태로워 원균과 함께 마주하여 계획을 짜고, 별도의 기묘한 계획을 마련하여 나라의 치욕을 씻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도의 도사(종5품, 감찰 사무를 보는 관리) 최철진의 첩보가 뜻밖에 도착하여 비로소 상감께서 관서로 피난가셨다는 기별을 듣게 되어 놀랍고 통분함이 망극하여 오내가 찢어지는 듯하고, 울음소리와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종일토록 서로 붙들고 통곡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각자 배를 돌리기로 하고 초 9일 오시에 모두 전선을 거느리고 무사히 본영으로 돌아와서 이내 여러 장수들에게,  『배들을 더 한층 정비하여 바다 어귀에서 사변에 대비하라!』고 알아듣도록 타이르고 진을 파하였습니다.

순천 대장 유화섭이 빼앗아 온 우리나라 소녀는 나이 겨우 네댓 살로써 그의 신상명세를 알 길이 없으며, 보성 군수 김득광이 빼앗아온 소녀 1명은 나이는 좀 들었으나, 머리를 깎아 왜인 같았는데 여러 상황을 심문해 봤더니, 임진년 5월 7일 동래 동면 응암리에 사는 백성 윤백련으로서 나이는 열네 살이며, 아무 날 아무 곳에서 왜인을 만나 누구누구와 같이 포로가 되었다가 그날 한창 싸울 때, 도로 붙잡혀 나오게 된 연유와 왜적들의 모든 소행을 비롯하여 생년월일과 신분들을 아울러 진술하였는데, 심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다대포 수군 곤절로서 왜란이 일어나자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고, 어머니는 양가집 딸로서 이름은 모론이나 지금은 죽었으며, 할아버지, 할머니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소인은 기장현의 신선 김진명의 머슴인데, 날짜는 기억할 수 없으나, 지난 4월에 왜적들이 부산포에 와서 대었으며, 마을에서 맨 우두머리 김진명은 군령에 의하여 소인에게 군사장비를 지우고 부산진으로 데리고 가는데, 마빌이현(범내골, 미나리고개)에 이르자, 왜적이 벌써 부산을 함락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도로 소인을 데리고 도로 기장현으로 달려가 성안에서 진을 쳤습니다. 그뒤에 군졸들이 달아나 버리므로, 김진명도 자기네 집으로 저를 데리고 가서 하룻밤을 지내고 나니, 소인의 아버지와 친척들이 이곳으로 피난해 왔다가 우연히 길가에서 만나 그 고을(기장현) 경계의 운봉산 속에 숨어서 8~9일 동안을 지냈는데 왜적들이 무수히 함부로 쳐들어와 소인과 오빠 복룡등은 먼저 사로잡혔습니다. 해질 무렵에 부산성 가운데에 이르러 밤을 지냈는데, 오빠 복룡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고, 소인은 배밑창에 넣어 두고서는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나, 하루는 왜적선 30여 척이 김해로 향하여 떠나, 반쯤은 뭍에 내려 그곳에 도둑질하며 머물기를 5~6일이 지났으며, 이 달 초 6일 사시(09:00~11:00)에 한꺼번에 출항하여 율포에 와서 밤을 지내고, 7일 꼭두새벽에는 그곳에서 옥포 앞 바다에 이르러 머물렀습니다.

그날 한창 싸울 때에 왜적의 배 안에 우리나라의 철환과 장전과 편전이 비오듯 쏟아져 맞은 놈은 곧 넘어져서 피를 줄줄 흘리자, 왜적들은 그저 아우성치며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모두 물에 뛰어 들어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소인은 말소리가 서로 통하여 사로잡혔습니다만, 어리석은 사람이라 배밑창 아래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일들은 알지 못합니다. 』라고 진술하였습니다.

위에 말씀드린 윤복연과 어린 계집 등은 순천, 보성 등 관원에게 <각별히 보호하라>하고 돌려주었습니다. 흉악하고 더러운 왜적들의 해독이 이토록 이르렀으니, 벌써 많이 살육되고 약탈당하여 한편으론 어진 백성들도 어버이나 자식을 잃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이 이번에 연해안을 두루 돌아보니, 지나가는 산골짜기마다 피난민 없는 곳이 없으며, 우리 배를 한번 바라보고는 아이나 늙은이나 짐을 지고 서로 이끌며 흐느껴 울며 부르짖는 것이 다시 살아날 길을 얻은 것처럼 좋아하고, 혹은 왜적의 정적을 알려주는 자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보기에도 불쌍하고 가여워 곧 태워서 가고자 했으나, 너무나 많을 뿐 아니라, 전쟁에 나가는 배에 사람들을 가득 실으면, 배를 모는 데 편리하지 못함을 염려하여 그들에게, 『돌아올 때에 데리고 갈 테니, 각각 잘 숨어서 왜적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여 사로잡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라고 알아듣도록 타이른 뒤에 왜적을 쫓으러 멀리 떠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서쪽으로 임금께서 난리를 피하셨다는 기별을 듣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노를 재촉하여 그대로 돌아 왔으나, 가엾고도 딱한 정은 오히려 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들 피난민이 집을 나온 지 날이 오래되어 남은 곡식마저 바닥나서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도의 겸관찰사에게, 『끝까지 물어서 찾아내어 떠돌이들을 데리고 돌아와 구호하기 바랍니다.』라고 공문을 보냈습니다.

대체로 보아 신이 거느린 여러 장수와 관리들은 모두 분격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적진에 돌진하면서 함께 대첩하기로 기약하였습니다. 그래서 무릇 지금까지 해전에서 40여 척을 불태워 없앴으나, 왜적의 머리를 벤 것이 다만 둘뿐입니다. 그러나 신이 섬멸하고 싶은 대로 다 못한 것이 한층 더 통분하오나, 한창 싸울 때를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적선은 빠르기가 나는 듯한데, 우리 배를 보더니, 미처 달아나 숨지도 못하면, 으레 기슭을 따라 고기두름 엮은 듯이 배를 몰고 다니다가 형세가 불리하면 뭍으로 올라가 버리는 까닭에 이번에도 섬멸하지 못하여 간담이 찢어질 것 같아 양날칼을 어루만지면서 혀를 차고 탄식하였습니다.

왜적선에 실렸던 왜의 물건은 모두 찾아내어 다섯 칸 되는 창고에 가득 채우고도 남았으며, 그 나머지 자질구레한 잡물은 다 기록하지 못하고 그 가운데서 전쟁에 쓰일 만한 물건을 골라서 따로 그 종류대로 모아 놓았습니다. 김해부의 하급 사무를 보는 인적사항 기록문서와 군사 배치 문서 및 여러 가지 활?화살 등을 아울러서 조목조목 적었습니다. 왜선에 실린 물건 중에 우리나라의 쌀 300여 섬은 여러 전전의 굶주린 격군과 사부들의 양식으로 골고루 나누어주고, 의복과 목면 등의 물건도 싸움에 나가는 군사들에 나누어주어서 왜적을 무찌르고 나면 이익이 따른다는 마음을 생기게 하려는 바, 아직은 그대로 두고 조정의 조치를 기다립니다.

무릇 왜적들은 붉고 검은 쇠갑옷을 입고, 여러 가지 쇠투구를 쓰고 있었으며, 입언저리에는 『말갈기』가 종횡으로 뻗쳐 있어서 마치 『탈바가지』같았으며, 금빛 관, 금빛 깃, 금빛 가래, 깃옷, 우추(새의 깃으로 만든 비), 나각(소라 고동으로 만든 악기) 등과 같은 것들은 기이한 모양이기에 무척 사치하며, 귀신 같기도 하고 짐승 같기도 하여 보는 사람마다 무척 놀라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또 성을 깨뜨리는 여러 기구로는 큰 쇠못, 사줄 같은 것도 역시 매우 흉측하고 괴상하였으므로, 군용 물품 가운데 가장 많이 쓰일 것 한 가지씩을 추려내어 봉인하여 올립니다.

그 가운데서 쇠갑옷, 총통 등의 물품과 낙안 군수 신호가 벤 왜적 머리 1급은 왼쪽 귀를 도려서 궤 안에 넣고 봉하여, 처음 싸울 때 공로를 세운 신의 군관 송한련과 진무 김대수 등에게 주어서 올려 보냅니다. 그 나머지 물건도 원 수량대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한창 싸울 때, 순천 대장선의 사부이며 순천에 사는 정병 이선지는 왼쪽 팡 한 곳에 화살을 맞아 조금 다친 것 이외에는 아무도 다친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경상우수사 원균은 단 3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신의 여러 장수들에게 사로잡힌 왜적선에 활을 쏘면서 빼앗아 가니, 사부와 격군 2명이 다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주장으로써 부하들의 단속을 잘못한 일이니,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경상 지방 소속인 거제 현령 김준민은 멀지 않은 바다에 있고, 그가 관할하는 지역 안에서 연일 교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장인 원균에게 빨리 오라는 격문을 보내었으나, 끝내 그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꼴은 엄청 놀랄 일이니 조정에서 조처하시옵소서.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적을 막는 대책에서 수군으로써 작전하지 않고서 왜적을 따라 나아가거나 물러나더라도, 오로지 육전에만 힘을 다하여 성을 지켰기 때문에 나라의 수백 년 기업이 하루아침에 왜적의 소굴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목이 메여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왜적이 만약 배를 타고 본도(전라도)로 침범해 온다면, 신이 해전으로써 목숨을 바쳐 이들을 맡아내겠습니다. 그라나 육지로 침범해 오면, 본도의 군사들은 싸움말이 한 필도 없으니, 대응할 도리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순천의 돌산도, 백야곶과 흥양의 도양장에서 기르는 말 가운데서 싸움에 쓸 만한 말들이 많이 있으므로, 넉넉하게 몰아내어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어 살지게 먹이고, 달리기를 훈련시켜서 전쟁터에서 쓴다면 승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의 독단으로 말씀드릴 일이 아니나, 사태가 급급하여 겸관찰사 이광에게 감독관을 정해 보내게 하고, 말을 몰아내는 군사는 각 진포에서 뽑혀 온  군사를 동원하여 1~2일 기한으로 잡아와서 훈련시키도록 공문을 보냈습니다.

삼가 아룁니다.

1592년 5월 10일 절도사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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