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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용호-천안
작성일 2013-06-04 (화)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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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元均)을 생각한다
원균(元均)을 생각한다

인품이 청렴하고 부하에 신뢰 얻었던 猛將

[출처] 국방일보 2011-04-27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원균 사당과 영정. 임진왜란 해전도.



1592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군을 동원해 조선을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조선은 전쟁에 대한 준비가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면서 진격하자 곳곳의 조선장군과 지방관리들은 도망치기 바빴다.



이 당시 조선군이 죽지 않았음을 보여준 장군이 원균 장군이다. 그는 당시 경상우수사로 영남지역의 해역 반을 책임지는 제독이었다. 경상좌수사였던 박홍과 장병들이 왜군과 싸우지도 않고 다 도망치면서 경상좌수영은 궤멸했다.


이제 경상우수영의 원균만 남았다. 700여 척의 전함으로 침략한 일본과 맞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척후를 통해 대응책을 모색했다.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해 주요 지역에 대한 방어를 철저히 하는 한편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5월 7일 옥포해전에서 이순신과 합세해 적선 26척을 격침했다.



이후 합포해전ㆍ적진포해전ㆍ사천포해전ㆍ당포해전ㆍ당항포해전ㆍ율포해전ㆍ한산도대첩ㆍ안골포해전ㆍ부산포해전 등에 참전해 이순신과 함께 일본 수군을 무찔렀다.



해전에서 사용한 전술에서 이순신과 원균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이순신은 선박의 빠른 이동과 막강한 화력을 동원한 포격 위주의 공격을 선호했다.



그러나 원균은 독특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의 전투 스타일은 과감한 당파(撞破) 작전이었다. 왜군의 전함은 삼나무로, 조선군의 전함은 소나무로 돼 있어 우리 배가 더 견고하고 튼튼한 점을 이용한 것이다.



그는 과감하게 적선에 부딪쳐 왜군의 배를 격침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 전술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근거리 전투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조총으로 무장돼 근거리 전투에 우월함을 보였던 왜군들과의 전투에서는 위험 부담이 매우 큰 전투 방식이었다.



그러나 원균과 그의 장수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적선으로 뛰어들어 예상하지 못한 전공을 세우곤 했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군을 1개월간 전라도 해역에 진출하지 못하게 한 것은 수적 열세를 용맹으로 막아낸 원균 장군의 공이 컸다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원균이 이순신과 협력해 승전을 거듭할 무렵 육지에서는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서 패배하면서 한양이 왜군에게 함락됐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면서 그와의 불화 탓에 원균은 해군을 떠나 육군인 충청절도사로 자리를 옮겨 상당산성을 개축했고 이후에는 전라좌병사로 옮겼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면서 이순신의 파직으로 수군통제사가 됐다. 원균 장군은 기문포해전에서 승리해 조선군의 사기를 드높였다.



그러나 안골포와 가덕도에 있는 왜군 본진을 공격하는 작전을 두고 도원수 권율에게 육ㆍ해군의 협공작전을 건의했다가 묵살당하고 오히려 곤장형까지 받았다. 결국, 칠천량해전에서 참패하고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 등과 함께 전사하게 된다.



원균은 경상도병마절도사 원준량의 장남으로 평택시 도일동에서 태어났는데, 원주 원씨 집안은 대대로 뛰어난 무인이 배출된 명문집안이다.



원균 장군의 형제들과 가까운 친척들이 임진왜란 때 국가를 위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던 애국적인 집안이기도 하다. 원균은 무과에 급제한 뒤 조산만호(造山萬戶)로 있을 때에는 여진족을 토벌한 공로로 젊은 나이에 부령부사로 특진했다.



성격이 호탕하고 용맹해 전투에 앞장서는 용장이며, 청렴하고 부하들을 아껴 신뢰를 얻었고, 상당산성을 수축할 때는 공사장에 토굴을 파고 기거하며 공사를 독려했다는 실록의 기록도 있다. 해군 제독으로는 다소 부족했을지 몰라도 육군 장군으로는 참으로 용맹한 장군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3년, 선조임금은 이순신ㆍ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등에 올려 그의 애국심과 공로를 기렸다.



[Tip] 신립과 원균의 다른 점은 - 독자적인 전투 권한ㆍ상부의 압력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 군대가 패배한 대표적인 전투가 신립 장군이 이끈 탄금대 전투와 원균 장군이 이끈 칠천량전투다.



이 두 장수의 공통점으로는 북방 정벌전쟁에서 뛰어난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차이라면 신립은 자기의 전략전술대로 전투했고, 원균은 상부의 압력으로 독자적인 해군 제독으로서의 전쟁을 펼치지 못했다는 점이다.



탄금대전투는 신립이 이끄는 8000명의 조선군이 탄금대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만8700명의 왜군과 벌인 전투다. 조령에서 싸워야 한다는 종사관의 주장을 묵살하고, 넓은 들판에서 기병을 이용해 싸우면 이길 수 있다고 신립은 판단했다. 결과는 신립의 조선군이 크게 패배했다.



일본군의 본진이 있는 안골포를 공격하라는 도원수 권율의 말에 수군 단독 공격보다는 육군과 같이 협공해야 승산이 있다고 원균이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묵살되고 결국 칠천량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거의 전멸하고 만다.



후일 역사가들은 똑같은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음에도 신립에게는 후한 평가를, 원균에게는 혹독한 평가를 한다. 만일 원균에게 신립에게처럼 독자적인 전투권한을 주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이름아이콘 을파소
2013-08-10 00:44
재미있는 글이군요. 이 글을 예전에 본 적이 있어 제 블로그에 관련 글을 남겻는데요. '그러나 원균은 독특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의 전투 스타일은 과감한 당파(撞破) 작전이었다. '라고 나왔죠? 그런데 당파에 대해선 사실 실제 사실이 좀 다릅니다. 얘기가 기니 제 블로그 링크로 대신하죠. http://history21.egloos.com/2792361

그리고 '당산성을 수축할 때는 공사장에 토굴을 파고 기거하며 공사를 독려했다는 실록의 기록도 있다.'고 하는데, 물론 그런 기록 있긴 합니다. 그리고 비가 오니 도로 무너졌다는 기록도 실록에 나오죠. 그렇단 말이죠.

이 애기들은 제가 미력하게나마 쓴 책에서도 나옵니다. 사서 보시면 좋지만, 여의치 않으면 도서관에서라도 한 번 보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029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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