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작성자 용호-천안
작성일 2013-06-12 (수) 00:00
ㆍ추천: 0  ㆍ조회: 983      
IP: 121.xxx.152
택당 이식이란 쓰레기가 쓴 이운룡 장군 묘비명이라,,,ㅎㅎㅎ
평원님이 누구신지 모르겠고
택당 이식이란 쓰레기가 당파와 이씨 가문의 이익에 눈이 멀어
임진왜란의 기록을 그것도 원균과 이순신에 대한 기억을 조작한 넘이라는 사실은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고
그 조작의 일환으로 원균 장군의 부하였던 이운용 장군의 묘비명조차 악용했다는 것은 불을 보듯뻔한 것 같은데 어떤 의도를 갖고 이런 글을 원주원씨 홈페이지에 올린 것인지 모르겠네요,,,
 
임진란 개전초 경상좌수사 박홍이 배를 모두 버리고 도주했고
경상우수사 원균장군이 홀로 고군부투하면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수차례 협조를 요청했지만
번번히 거절하다 20여일만에 마지못해 옥포해전에 참여한 것이라는 것도 만천하에 드러났는데
이런 임란 개전초 이순신의 행태를 감추려고 다시 또 택당 이식이란 쓰레기가 작성한 이운용 묘비명을
게시하면서 원균 장군의 행적을 조작 폄하시키고 있는 평원이란 분의 진정한 의도가 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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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성군 이공의 묘비명[息城君李公墓碑銘] 병서(幷序)

효충장의선무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 가선대부(嘉善大夫)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 식성군(息城君) 이공(李公) 휘(諱) 운룡(雲龍)의 묘소는 청도군(淸道郡) 법귀산(法龜山) 선영(先塋)의 아래에 있다. 공이 돌아가신 지 20년이 지난 때에 덕수(德水) 출신 이식(李植)은 국론(國論)을 취집하고 가첩(家牒)을 상고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며 명(銘)하는 바이다.
임진년(1592, 선조 25) 봄에 왜적이 처음 난리를 일으켰을 때 영남(嶺南) 일로(一路)가 먼저 무너졌다. 이에 우수사(右水使) 원균(元均)이 바야흐로 배[船]를 버리고 달아나려 하자, 당시 옥포 만호(玉浦萬戶)로 있던 공이 항거하며 말하기를,
“사군(使君)은 국가로부터 중한 임무를 부여받았으니, 의리로 볼 때 자신의 관할 지역을 사수(死守)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지역은 바로 양호(兩湖 호남과 호서, 즉 전라도와 충청도임)의 요충(要衝)에 해당하니, 이곳이 무너지면 양호도 절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
지금 우리 무리가 비록 피폐해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병력을 끌어 모아 지킬 수가 있고 또 호남의 수군(水軍)도 온전하게 남아 있다. 따라서 군대를 정돈한 다음 견내량(見乃梁)을 차단하여 적이 거제(巨濟)를 지나 서쪽으로 향하지 못하게 한다면, 남방의 사태를 안정시킬 여지는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도 공은 지금 여기를 버리고 다시 어디로 가려 하는가.”
하였다. 그러자 원균이 성을 내며 말하기를,
“호남의 군대를 당신이 청해 올 수 있겠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사군이 나에게 명을 내린다면, 내가 어찌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다만 율포 만호(栗浦萬戶) 이영남(李英男)이 평소부터 그쪽 군대를 잘 알고 있으니, 그에게 시키는 것이 좋겠다.”
하자, 원균이 그 말을 따랐다.
공이 즉시 영등포 만호(永登浦萬戶) 우치적(禹致績)과 함께 거제(巨濟)로 가서 현령 김준민(金俊民)과 더불어 왜적을 토벌하겠다고 하늘에 맹세한 뒤 바다로 나가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영남이 호남에 가서 계획을 이야기하자, 좌수사(左水使) 이순신(李舜臣)이 과연 군대를 이끌고 나아왔다. 그런데 원균은 일단 사신을 보내 놓고 나서도 일이 잘 되지 않을 것을 걱정한 나머지 부대를 인솔하고 남해 바다속으로 항해하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호남의 군대를 만나게 되었으므로 부끄러운 기색을 보이며 돌아왔다.
이해 5월 10일에 공이 군대를 모아 옥포 앞바다에서 왜적을 격파하였다. 이에 왜적이 달아나 해안으로 올라가니, 적선(敵船) 50척을 모두 불사르고 돌아왔다. 또 영등포 앞바다의 전투에서도 10여 척의 적선을 불태웠다. 이날 밤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몽진(蒙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사들이 모두 울었고 호남의 군대도 돌아갔다. 이에 원균이 또 도망치려 하자 공이 강력하게 항의하여 만류하였으며, 독자적으로 병력을 규합한 뒤 육지와 바다를 왕래하면서 적의 군세(軍勢)를 꺾어 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호남의 군대와 연합한 뒤 사천(泗川)에 진을 치고 있는 왜적을 향해 진격해서 대포(大砲)를 쏘아 누선(樓船)을 박살내자 왜적이 크게 무너졌다. 이때 호남의 우수사(右水使) 이억기(李億祺)도 와서 모였으므로 군세(軍勢)가 조금 떨쳐지기 시작하였다.
6월에 진해(鎭海)의 왜적을 공격하였다. 왜적이 사면을 에워싼 가운데 적의 대추(大酋)가 기와집이 들어선 누선(樓船)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 깃발과 돛대 등 화려한 장식들이 현란하게 바다를 비추었으므로 이를 보는 자들이 현혹될 정도였다. 이에 공이 우치적(禹致績)과 함께 하루 종일 육박전을 벌인 끝에 그 누선(樓船)을 격파하자, 왜적들이 창황한 나머지 물에 빠져 죽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날이 저물면서 사졸(士卒)들이 피곤한 기색을 보였으나, 공이 더욱 급하게 독전(督戰)하면서, 쇠줄로 적선을 끌어당겨 바다 한 가운데로 나오게 한 뒤 뒤집어 엎었다. 이렇게 적을 크게 깨뜨린 뒤 새벽녘이 되어서야 작전을 중지하였다.
7월에 적선 수백 척이 견내량(見乃梁)을 넘어 오려 하였는데, 군세(軍勢)가 예전보다 훨씬 성대하였다. 공이 부대 장병과 계책을 정한 뒤 접전(接戰)을 하다가 거짓 패한 척하고 물러나 외양(外洋)으로 끌어내고 나서 합격(合擊)을 하니, 대포의 화염으로 바다가 끓어 오르면서 왜적이 크게 섬멸되어 파도가 온통 붉은 빛으로 변하였다. 또 안골포(安骨浦)에서 전투를 벌여 적선 30척을 깨뜨렸다. 이로부터는 왜적이 감히 내양(內洋)에 들어오지 못했으므로 양호(兩湖)의 운송 길이 막히지 않게 되었다.
이때 원균(元均)은 노량(露梁)에 정박해 있기도 하고 남해(南海)로 떠나기도 하면서 오직 호남의 군대가 진퇴(進退)하는 것만을 구경할 뿐이었다. 그리고 선봉 부대를 배치할 때에는 오로지 공 등을 앞세웠는데, 공 등이 전승(戰勝)을 거두기만 하면 그때마다 번번이 전리품(戰利品)을 거두어들이면서 자신의 전공(戰功)으로 조정에 계문(啓聞)하곤 하였다.
또 남해 현감(南海縣監) 기효근(奇孝謹)이 배를 이끌고 도망쳤는데, 오로지 주육(酒肉)을 가지고 원균에게 아첨을 떨었으므로 원균이 늘 그를 감싸주었다. 하지만 공은 이런 일 모두에 대해서 개의(介意)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이 때문에 원균을 싫어하고 공을 훌륭하게 여겼다.
가을에 가덕포(加德浦)로 나아가 진(陣)을 친 다음 마침내 부산(釜山)의 왜적에게 육박해 들어갔는데, 적이 진영 속에만 웅크리고 있을 뿐 감히 나와 접전을 벌이려 하지 않았다.
이듬해에 웅천 현감(熊川縣監)으로 자리가 옮겨졌다. 이순신이 이때 비로소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가 되고 나서 공의 전공을 열거하여 체부(體府)에 보고한 뒤 장차 공을 천거하여 자신의 후임자로 삼으려 하였다.
을미년(1595, 선조 28)에 은상(恩賞)을 받고 품계(品階)가 통정(通政)으로 올랐다.
병신년(1596, 선조 29)에 좌수사(左水使)로 옮겨 제수를 받은 뒤 염포(塩浦)에 진을 설치하고 왜적에게 시달린 백성들을 불러 모아 안정시켰으며 전함(戰艦)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였다. 이때 왜장(倭將) 청정(淸政)이 탁성(卓姓)을 가진 부장(副將)을 파견하여 공에게 예물을 증정하였으며, 또 역자(譯者)에게 묻기를,
“명장(名將) 한 분이 우도(右道)에서 옮겨 왔다고 들었는데, 이분이 바로 그분인가?”
하면서, 마음속으로 매우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정유년(1597, 선조 30) 여름에 원균이 전투에 패해 죽고 제포(諸浦)의 수비가 무너지자 적이 마침내 양호(兩湖)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에 공이 조정의 명을 받들고서 배를 버리고 육지로 이동하여 영천(永川) 창암(蒼巖) 들판에서 접전을 벌였는데, 적이 이 때문에 동쪽으로 향하지를 못하였다.
겨울에 중국 군대가 도산(道山)을 포위하자, 공이 대왕암(大王巖)에서 배를 인솔하고 나아와 협격(挾擊)하였는데, 중국 군대가 퇴각하였으므로 공도 물러 나왔다.
이듬해 가을에 중국 군대가 재차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때 공은 왜적을 산채로 잡아 그로부터 관백(關伯)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있었으므로, 군대를 정비한 뒤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왜적을 추격하였다. 그러고 나서 군대를 돌려 부산(釜山)으로 돌아와 수영(水營)을 복구하고 백성을 모아 둔전(屯田)을 설치하는 한편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군량도 넉넉하게 비축해 놓았다.
겨울에 탄핵을 받고 체직(遞職)되었다. 체찰사(體察使) 이덕형(李德馨)이 막하(幕下)에 불러들인 뒤 일이 있을 때마다 공에게 자문을 구해 결정하곤 하였으며, 공을 남도 주인(南道主人)이라고 일컬으면서 중하게 대하였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곧바로 좌수사(左水使)에 복직되었다. 이에 부세(賦稅)를 거두고 무비(武備)를 정돈하는 일에 더욱 힘을 기울여 영진(營鎭)의 면모를 한층 새롭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부인(母夫人)의 병세(病勢)가 위독해졌다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달려가 간호를 하였다. 그러자 통제사(統制使) 유형(柳珩)이 진(鎭)을 버리고 갔다고 탄핵을 하였으므로, 신문을 받고 서생포(西生浦)로 장류(杖流)되고 말았는데, 모부인이 결국 회생하지 못하자 사람들이 모두 이를 원통하게 여겼다. 곧 이어 방환(放還)되어 모친상을 마쳤다.
을사년(1605, 선조 38)에 녹훈(錄勳)됨과 동시에 군(君)에 봉해지고 법 규정에 따라 은상(恩賞)을 하사받았으며,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 포도대장(捕盜大將), 화기도감제조(火器都監提調)를 겸하였다. 그리고 비변사 당상(備邊司堂上)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는데, 공이 건의한 여러 가지 계책이 많이 채택되었다. 그 뒤 얼마 있다가 통제사(統制使)로 나갔는데, 임기가 만료되지 않아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정미년(1607, 선조 40)에 홀호(忽胡 홀자온(忽刺溫) 부족)가 변방을 침입하자, 공을 기용하여 함경도 병마사(咸鏡道兵馬使)로 삼으면서 처음으로 육군대장(陸軍大將)의 직임을 부여하였다. 공이 이에 그곳의 풍속에 따라 동요시키지 않고 어루만져 제어하는 한편, 특별 부대의 기병(騎兵)을 창설하고 갑산(甲山)의 성곽을 수선하자 변방의 상황이 크게 안정되었다. 임기를 채우고 나서 돌아와 충청 수사(忠淸水使)로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경술년(1610, 광해군 2)에 또 탄핵을 받고 체직되어 집에 돌아왔는데, 종기를 앓으며 오래도록 낫지 않다가 7월 2일에 이르러 생을 마치니, 수(壽)가 49세였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조정에서 관례에 따라 제사를 행하도록 하였다. 그 뒤 10월 14일에 예장(禮葬)을 하였는데, 조야(朝野)에서 모두 공이 일찍 죽은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공은 본래 신라(新羅)의 원신(元臣)인 이 알평(李謁平)의 후예이다. 고려(高麗) 초에 문하 시중(門下侍中) 우칭(禹偁)이 부마(駙馬)로 재령군(載寧君)에 봉해졌는데, 이로부터 재령 이씨가 있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후세에 이르러 청도(淸道)로 옮겨 살게 되었는데, 대대로 높은 관직을 역임하는 벌족(閥族)이 되었다.
증조부 모(某)는 제용감 정(濟用監正)이고, 조부 모는 부령 부사(副寧府使)이고, 부친 모는 남해 현령(南海縣令)이었는데, 3세(世) 모두 무과(武科)를 통해 벼슬길에 올랐으며, 특히 부령과 남해는 대를 이어 무과에 장원을 하였다.
모친 이씨(李氏)가 가정(嘉靖) 임술년(1562, 명종 17) 9월 16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광릉(廣陵) 이춘남(李春男)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엄(儼)은 전 평택 현감(平澤縣監)이고 딸은 박위(朴瑋)에게 출가하였다. 엄은 현감 김덕망(金德望)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을 두었는데 어리다.
공은 어린 나이에 모친을 잃었는데, 그럼에도 예법대로 행하면서 거애(擧哀)를 극진히 할 줄을 알았다. 일단 성장해서는 스승 밑에서 학업에 힘을 쏟아 향리의 칭찬이 대단하였다. 공이 비록 무과를 통해 벼슬길에 나서기는 하였지만, 시간이 한가할 때면 마치 유생처럼 서책과 서한(書翰)을 가까이 하곤 하였다.
공은 천품이 온화하고 후덕스러워 평소의 생활을 보면 신실(信實)한 장자(長者)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일단 변란이 일어나 절조를 세워야 할 상황을 맞게 되면, 신채(神采)가 우뚝 비범하게 드러나면서 언론을 높이 떨치고 일어났으며, 일단 사태를 파악하여 뜻을 결정한 뒤에는 죽음만 있을 뿐 일체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요새를 책임진 장수의 신분으로서, 영남과 호남의 군대가 연합작전을 펼칠 수 있게 주선하였고, 강한 왜적들 사이를 출입하면서 싸울 때마다 승리를 거둘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처음에 원균과 이순신 사이에 크게 틈이 벌어졌을 때, 조정에서 친하게 지내게 하려고 애를 썼으나 끝내 화해를 시키지 못하였다. 그런데 유독 공만은 두 사람 사이에서 공정한 마음가짐으로 처신을 하면서 누구의 편도 들지를 않았으므로 두 사람 모두 공을 중하게 여겼다.
원균이 당초에 공의 계책을 귀담아 들었을 때에는 싸움에서 패하지 않을 수가 있었는데, 급기야 공이 좌수사(左水使)로 옮기고 나서는 원균이 마침내 패몰(敗沒)하고 말았으므로, 사람들이 더더욱 이 때문에 공의 공적이 두 장수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생각건대, 공은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지도 않고 높은 자리로 진출할 욕심도 내지 않은 채 외로운 처지에서 홀로 높은 절조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간혹 언관(言官)에게 시달림을 당하기도 하면서, 그 훈작(勳爵)과 직질(職秩)이 겨우 효근(孝謹) 정도와 같게 되었을 뿐이었으므로, 식자들이 이를 한스럽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각에서 살펴보건대, 임진(壬辰)ㆍ정유(丁酉)의 왜란에서 왜적을 토벌한 병장들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공에게 비길 만큼 공상(功賞)을 보유하고 시종일관 온전히 해 나가면서 아름다운 명성을 지니게 된 이들은 겨우 한두 명에 불과할 정도이다. 그러고 보면 충의(忠義)와 신양(信讓)의 인사에게 결국 보답이 돌아오고야 만다는 사실을 또한 알 수가 있겠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멋대로 호기 부리는 이 용기가 있다 하고 / 有驕豪以爲勇
속임수 부리는 이 지혜롭다 하는 세상 / 有譎誑以爲智
공은 홀로 그렇게 하지를 않고 / 公獨不然
누차 공적 세워 높은 지위 올랐어라 / 累功以崇位
저들 모두 위태한 시대 안일하게 보냈지만 / 彼皆安其危
이분만은 그 명성 부끄럽지 않았나니 / 此獨名不愧
범처럼 용맹스러운 무신들이여 / 凡百虎臣
나의 이 명을 눈여겨 볼지어다 / 我銘是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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